[세계포럼]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유엔 조롱

2024-11-06

국제사회의 ‘약육강식’ 악습 여전

영구 평화 위해 유엔 창설했으나

러시아 거부권 행사 탓에 무력화

새로운 집단안보 체제 모색 절실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40년 5월 프랑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나치 독일 군대에 국토를 유린당하는 와중에 파시스트 이탈리아마저 독일 편에서 참전을 저울질했다. 당시 프랑스 동맹국인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프랑스 침공에 가담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훗날 처칠은 2차대전 회고록을 통해 무솔리니한테 받은 답신 내용 일부를 공개했다.

“1935년 제네바에서 이뤄진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가 영국 정부에 의해 주도됐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 아프리카에서 자그마한 양지바른 땅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네바’란 오늘날 유엔의 전신으로 스위스 제네바에 있었던 국제연맹을 가리킨다. ‘자그마한 양지바른 땅’이란 1935년 이탈리아가 자국 식민지로 만들고자 침략한 에티오피아를 뜻한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공격 직후 영국·프랑스가 이끌던 국제연맹은 이탈리아를 겨냥한 경제 제재에 돌입했다. 그러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국제연맹 탈퇴로 맞대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쟁 예방과 영구 평화를 목표로 출범한 국제연맹이 실은 허울뿐인 기구임이 여실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에티오피아 국민 입장에서 보면 ‘자그마한 양지바른 땅’은 모욕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비정한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땅은 곧 최고의 ‘먹잇감’이란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구한말 제국주의 일본이 보기에 조선이 딱 그랬을 것이다. 나치 독일이 2차대전을 일으킨 명분은 이른바 ‘레벤스라움’(Lebensraum·생활권)의 확보였다.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게르만 민족의 여유로운 삶을 위해 폴란드부터 소련(현 러시아) 서부까지 광활한 동유럽 지역을 독일이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결국 그 영토를 빼앗으려는 것 아니겠는가.

실패한 국제연맹을 대신해 1945년 출범한 유엔은 ‘강대국에 의한 평화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2차대전 승전국인 미국·영국·소련·중국·프랑스 5개국에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이란 막강한 지위를 부여했다. 유엔을 기업에 비유하면 다섯 나라는 그 최대 주주에 해당한다. 국제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이 출현하는 경우 5대국이 힘을 모아 격퇴할 것이란 기대가 깔려 있었다. 강대국들끼리 서로 반목하는 상황을 막고자 거부권이란 안전장치까지 고안해냈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이란 ‘공동의 적’이 제거된 뒤에도 5대국의 협력이 지속될 것이란 믿음은 너무 순진했음이 판명 났다. 국제사회에서 평화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할 강대국이 되레 침략자로 돌변하는 경우 이를 막을 수단이 지금의 유엔에는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안보리는 이를 무력하게 지켜보고만 있다.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 탓이다. 북한이 탄도미사일 발사, 우크라이나 전선 파병 등 온갖 도발을 저질러도 유엔은 추가 제재를 가하지 못한다. 그 또한 러시아가 반대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지난 10월24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났다. 구테흐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국제법 및 유엔 헌장 위반으로 규정하며 “우크라이나에 정의로운 평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자 푸틴은 대뜸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러면서 “사무총장께선 우리 모두 하나의 큰 가족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불행히도 가정에서는 종종 다툼과 소란, 재산 분할, 심지어 싸움도 일어난다”고 말했다. 자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창립 당시부터 최대 주주 노릇을 해온 유엔을 대놓고 부정하며 조롱한 것이다.

유엔은 1948년 한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한 뒤 유엔군을 조직해 같이 싸우는 등 우리와 깊은 인연을 맺어 왔다. 하지만 지금의 유엔은 세계 안보에 더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무기력한 기구로 전락한 모습이다. 이제 한국 정부도 기존 유엔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집단안보 체제 구축 혹은 참여를 적극 모색할 때가 되었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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