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회사는 앞으로 30일 후면 망합니다.”
반도체 기업 가운데 세계 최대 시가총액(약 4600조 원)을 기록 중인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은 1993년 창업 이후 줄곧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위기 의식을 불어넣는 ‘채찍’ 같은 메시지다. 지나친 엄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젠슨 황은 진심이다. 회사가 실제 망할 고비를 수차례 넘으며 지금의 성공 신화를 일궜기 때문이다. 잘나가던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몰락해 시체처럼 널브러진 실리콘밸리 한복판에서 그는 늘 치열하게 위기를 돌파해온 야전 사령관이다.
‘생각하는 기계’는 젠슨 황의 거침 없는 ‘광속 경영’ 스타일이 잘 드러나 있는 그의 첫 공식 자서전이다. 뉴요커 기자인 저자에게 젠슨 황이 요청해 세상에 나오게 됐다. 저자는 약 3년간 300여 명에 달하는 주변 인물들과 젠슨 황 본인을 심층 인터뷰해 촘촘하고 생동감 있게 엔비디아의 ‘32년 전력 질주’ 과정을 풀어낸다.
태국에서 형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젠슨 황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든 운동이든 남다른 집념을 보였다. 대학 졸업 후 AMD 등 실리콘밸리 유망 기업에서 안정적인 경력을 쌓으며 경제적 여유와 화목한 가정을 꾸리던 그는 어느 날 알고 지내던 엔지니어들로부터 스타트업 공동 창업 제안을 받고 삶의 궤적을 완전히 바꾼다. 아내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고 통장에는 고작 6개월치 생활비가 전부였지만 그는 도전을 택했다.
PC 게임용 그래픽 가속기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IT 대기업들이 관심조차 두지 않는 틈새 시장에 불과했다. 게다가 첫 제품은 실패작이었다. 투자금이 바닥날 무렵 무모하다 싶을 만큼 과감하게 개발한 신제품 NV3가 시장에서 반응을 얻으며 간신히 회생했다. 시제품을 만든 후 문제를 보완해 신제품을 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젠슨 황은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가상 테스트 기기인 에뮬레이터로만 실험하고 바로 신제품을 내놨다. 이처럼 빠른 의사 결정과 실행력은 이후 ‘광속 경영’이라는 엔비디아의 경영 DNA로 자리 잡는다.
게임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엔비디아는 뛰어난 성능과 합리적인 가격을 갖춘 ‘지포스’ 그래픽카드를 흥행시키며 도약했다. 이와 함께 ‘병렬 연산’, 즉 대량의 계산을 빠른 속도로 해내는 GPU(Graphics Processing Unit)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기술로 구현하면서 더 진화했다.
지금은 AI 시대의 핵심 기술로 각광받는 GPU지만 2000년대 이후 한동안 수요처를 찾지 못해 엔비디아는 긴 침체기를 겪었다. 하지만 젠슨 황은 ‘제로 빌리언 달러 시장(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장)’이라 확신하며 막대한 자원과 인력을 제품 개발에 투입했다. 특히 자사 기술 플랫폼 ‘쿠다(CUDA)’ 개발을 위해 천재 엔지니어를 영입하고 비용을 아끼지 않았으나 실적은 부진했고 주가는 바닥을 쳤다. ‘연구개발 비용으로 차라리 배당을 하라’는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투자를 지속했고 이 선택은 결국 엔비디아가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으로 우뚝 서는 초석이 됐다.
책 전반에는 젠슨 황의 경영 철학과 리더십 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처음부터 준비된 CEO는 아니었다. 기본적인 회계 개념조차 없었지만 경제·경영 서적을 방 한가득 쌓아두고 탐독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했다. AI에 대해서도 2013년 무렵까지 딱히 관심이 없었다. 당시 쿠다 플랫폼 기반에서 신경망 개발을 돕는 소프트웨어를 제안한 직원의 설명을 계기로 직접 공부에 나섰고 그 잠재력을 인식하자마자 “우리는 더 이상 그래픽 회사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곧바로 AI 기업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광속 질주했다.
미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황의 분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 그래픽 칩 불량 사태(일명 ‘범퍼게이트’)가 발생했을 당시 그는 100여 명의 임원을 사내 강당에 모아 무려 두 시간 가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호통쳤다고 한다. 젠슨 황이 직원들에게 불 같이 화를 내는 일은 다반사다. 심지어 저자에게도 인터뷰 도중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을 하면 혼이 빠질 정도로 화를 냈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계산된 질책’이라고 해석한다. 조직이 거대해질수록 민첩함을 잃기 쉬운 만큼 때로는 강한 충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황이 가장 경계하는 것도 바로 관료주의다.
‘생각하는 기계’는 성공한 CEO의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다. 책이 나온 이후 벌어진 딥시크 쇼크 등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담지 못할 정도다. 엔비디아와 젠슨 황의 기술 진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AI 시대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념처럼 믿고 미래를 선도하는 한 기업가의 생각과 행동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반도체나 AI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기술적 배경 지식이 있다면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비유를 적절히 활용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어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2만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