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공화국과 재정민주주의

2025-01-14

현행 헌법은 국가재정과 관련해 조세법률주의를 천명하고 예산을 둘러싼 정부와 국회 간 권한의 배분에 대해 규정한다. 그러나 재정이 헌법 전문의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밝히지는 않는다. 국민의 기본생활 영위나 경제의 성장 안정을 위한 재정 역할을 명시한 다른 나라 헌법과는 차이가 있다. 아울러 우리 헌법은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의 관계도 별도로 밝히지 않는다. 무도한 권력자가 파면되고 응분의 처벌을 받고 난 뒤의 제7공화국을 예비하며 그간에 재정정책의 틀을 규율해온 관련법의 근본적인 개정에 관심을 갖게 되는 배경이다.

다만 제7공화국의 시대정신은 헌법과 국가재정법을 포함한 재정 관련법 개정에 있어 무엇보다도 재정민주주의의 실현을 지향해야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재정민주주의는 시민의 의사를 재정 활동에 실질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당위적 가치이다. 한국 현실에서 그 제도적 과제는 적어도 두 가지를 포함한다. 예산 과정에서의 국회 권한 강화, 그리고 예산법률주의가 그것이다.

먼저 첫 번째 과제부터 논한다. 정부가 시민사회로부터 재원을 조달해 지출하는 재정 작용은 재산권 제한 등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영향을 미치므로 기본권 보장을 위해 시민의 대표인 국회가 그 과정을 통제하는 것이 재정민주주의에 부합한다. 그런데 현행 법규범은 예산 기능과 관련해 기획재정부 권력 강화에 기여해 왔다. 대자본에 포획된 관료들이 정치적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재정 자원의 분배를 주도함에 따라 재정 권력을 가진 집단 및 그들과 결탁해 수혜를 입는 집단의 지대 추구에 취약한 구조이다. 이에 국회의 예산 편성권을 원천적으로 제한해온 현행 헌법 제57조가 재정민주주의 가치와 충돌할 소지에 대해 평가해야 하며 향후 완화하는 방향을 검토해야 한다.

기재부와 대통령실이 주도하고 각 부처가 참여하는 예산 편성 과정은 여러 한계점을 노정해왔다. 기재부가 관료주의와 재정보수주의로 치닫고 윤석열 정권처럼 대통령실이 전횡을 일삼아도 통제할 수단이 부족하다. 국회에 예산안 심의권이 있다고는 해도 시간과 정보의 제약으로 시민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부분적인 수정에 그칠 때가 부지기수다. 예산이란 것이 편성 단계에서 사실상 확정되는 요소들이 많아 국회의 예산 심의는 정부 예산안에 대한 수동적인 찬반에 그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산 편성은 행정부 조직이 독점하는 폐쇄적인 과정이어서는 안 된다. 국회가 정치적 책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개입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그 일환으로 특정 지역구의 이해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중장기적 관점에서 타당성을 논의할 수 있는 지출에 한해 국회의 증액을 허용하는 편이 바람직할 수 있다. 다만 그 경우에도 국회와 정부 간 견제와 균형을 위해 정부 예산안을 기준으로 증액의 가능 범위를 사전에 한정할 필요는 있다. 혹은 주어진 총액 내에서 사업별 예산 변경을 국회에 허용하는 방안도 검토 가능할 법하다. 항목 재조정은 정부의 예산 편성권에 대한 존중과도 조화될 여지가 상당하다. 적어도 세계적으로 선행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을 들어 무작정 반대할 일만은 아니다.

재정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두 번째 과제는 예산법률주의의 도입이다. 오래전 판례에 따르면 예산은 국가기관을 구속할 뿐으로 정부의 집행 행위를 통하지 않는 한 시민의 기본권에 직접 관련성이 없는 점에서 법률과 차이가 있다. 그러나 현대 경제학의 시각에서는 그 결정에 동의하기 어렵다. 재정 총량과 분야별 사업별 배분 등 재정과 관련된 의사결정 전체가 시민의 경제생활에 광범위하고 다면적인 영향을 미치며 시민의 기본권은 경제생활의 수준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점에서 예산 절차 전반에 걸쳐 그 기본권에 대한 영향이 현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들도 그래서 예산을 법률로 본다.

우리처럼 예산이 법률이 아닌 경우엔 국회가 심의해 확정한 사항을 정부가 위배해도 법률 위반이 아니다. 그 결과 윤석열 정권처럼 정부의 예산 집행 내용이 국회의 예산 확정 내용과 달라도 제어할 길이 없다. 현실에선 정부와 대통령실이 예산에 담긴 사업이라도 내용을 바꾸거나 지출하지 않을 수 있고 예산에 없는 사업이라도 자의와 독단으로 추진할 수 있다. 예산이 법률이 아닌 탓에 구속력이 없어 집행 책임성이 확보되지 않는 것이다. 국회가 사후 감사를 수행한다곤 해도 예산이 법률이 아닌 이상 한계가 뚜렷하다. 차제에 예산법률주의로의 전환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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