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장비업체 한화세미텍이 SK하이닉스에 1000억원 규모 담보를 설정한 것으로 드러나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납품 업체가 고객사에 직접 담보를 제공하는 건 이례적으로, 한미반도체가 한화세미텍에 제기한 특허 분쟁 영향으로 풀이된다.
27일 한화비전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자회사 한화세미텍은 SK하이닉스에 납품계약 이행보증 명목으로 1000억원을 담보로 설정했다.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에 1000억원을 청구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화세미텍은 803억원 규모 토지와 건물을 담보로 걸었다.
담보 설정은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용 열압착(TC) 본더 공급 계약 과정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한화세미텍은 지난 3월부터 HBM을 만드는 SK하이닉스로부터 TC 본더를 수주했는데, 누적 금액이 805억원이었다.
그런데 통상의 계약과 달리 담보 설정액이 많고, 방식도 이례적이어서 궁금증을 일으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납품 계약 이행보증은 공급망 진입 초기에 고객사로부터 요구받아 특이한 경우는 아니지만 보증보험사의 보증보험이나 은행의 지급보증서를 통해 제공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기업이 직접 보증 담보를 제공하는 건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보증금 비율도 일반적으로 계약금의 10~30% 수준이나 한화세미텍은 계약금액을 웃도는 담보를 제공했다. 회사가 내놓은 자산은 경남 창원공장 토지(5만1468.7㎡)와 2층 규모 건물(연면적 2만1150.14㎡) 등으로 추정된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지난해 12월 4일 한미반도체가 한화세미텍을 상대로 제기한 특허 침해 금지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보증 가입 심사에서는 계약이행 주체의 이행 능력을 중점으로 심사하는데 특허분쟁으로 가입에 어려움이 있었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 따르면 계약에 앞서 SK하이닉스도 한화세미텍에 향후 특허소송에서 패소할 경우 대처 방안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패소로 장비를 운용하지 못하게 되면 SK하이닉스도 HBM을 만들지 못하게 돼 피해가 커질 수 있으니 손해를 담보할 수 있는 방안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한화세미텍 관계자는 “계약 진행 과정에서 상호 간 신뢰 형성을 위해 마련한 최소한의 장치”라며 “공시 외 담보에 대한 추가적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에 TC 본더를 공급하며 불거진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의 특허분쟁은 정면 충돌 양상으로 진행 중이다. 한화세미텍이 법무법인 김앤장, 한미반도체가 법무법인 세종을 선임했으며, 한화세미텍은 최근 특허심판원에 한미반도체 TC본더 주요 특허 2건에 대한 무효 심판을 청구했다. 특허 효력을 상실시켜 특허 침해소송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다.
업계 한 관계자는 “한화세미텍이 보유 유형자산을 담보로 제공했다는 것은 기술적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소송 리스크가 현실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라며 “만약 향후 특허 소송 결과가 불리하게 나올 경우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진형 기자 j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