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을 사투리 버전으로 수정하다
우여곡절 끝에 ‘공구리’ 정도 되는 대본이 나왔다. 여전히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하는 대본이 나왔다는 게 중요하다. 엎어야 한다며 연장을 손에서 놓아버리는 것과, 집중하며 조용히 연장을 집어 들고 고칠 곳을 찾는 일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연장을 손에서 놓아버릴 때의 감정은 사람에 대한 실망과 분노이고, 시나리오 작업 이외의 일까지도 모두 끄집어내 결과물로 연결해 버리는 인지부조화가 일어난다. 연장을 찾게 하는 대본은 흠결보다 앞으로의 가능성에 집중하게 한다.
작가가 교체된 뒤 우악스럽게 고집 피우던 내 시나리오 버전과 이 결과물을 놓고 골똘히 집중하기 시작했고, 각각에 걸맞은 연장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럼 되는 거다. 극장에 걸리기까지, 촬영 중에도, 촬영 준비를 할 때도, 콘티를 쓰는 중에도, 대본이 제본되었을 때도 시나리오는 계속 수정하는 것이다. 마지막 결과물은 역시 이 ‘공구리’와 다른 모양새가 될 것이지만 어쨌든 힘이 난다. 그래서 작가에게 밤늦도록 칭찬해 줬다. 내가 원하는 구성을 잘 담아냈고, 내가 중점을 두는 에피소드들을 잘 녹여냈다. 이제 겨우 한 발을 떼게 됐지만 어쨌든 결과물에 대한 기대감이 들 수 있도록 짧은 시간에 수고 많았다고.
이전의 대본에는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정체불명의 사투리가 섞여 반구대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나온 건 각색 작가가 나름대로 유튜브를 뒤져가며 경상도 사투리를 공부해서 반영한 흔적이 있지만 여전히 조선팔도 사투리가 뒤섞여 있었다. 이 영화에는 오롯이 반구대만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구대 손방수 씨를 급하게 불렀다. 친구를 한 명 데리고 왔는데 바로 돌려보냈다. 서운해하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다. 한두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오후 6시부터 시작해 이재권 전 이장을 모델로 한 주인공 ‘중기’ 대사 하나 쳐내고 나니 자정에 가까웠다. 손방수 씨를 모델로 한 ‘미주’를 30퍼센트쯤 쳐내니 벌써 새벽 2시가 넘어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거칠게 손만 보고 4시가 다 된 때 내 차 열쇠를 주고 돌려보냈다. 친구가 먼저 가면서 손 여사 차를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본을 프로듀서에게로 보냈다. 리딩 리허설에 올 배우들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울산문화박람회 건으로 해운대로
되돌아보면 웃기는 일인데 지나고 보니 그땐 나도 지원사업이라는 걸 너무 몰랐고, 다른 한편으론 지원사업이란 게 참 구멍이 많은 제도란 걸 새삼 떠올리게 된다. 울산문화관광재단에서 지원받은 다큐멘터리는 세 번째 재공고가 떴을 때 지원해서 ‘조건부’ 통과를 했다. 처음엔 ‘조건부’라는 게 참 불편하고 불쾌했다. 아니, 이 말도 안 되는 예산으로 이미 4년간 진행해 왔던 분량에 더해서 지역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는데 조건부가 뭐냐, 조건부가. 그래서 선정 후 첫 대면 회의에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박람회 예산을 배정하지 않아서 조건부란다. 전 그걸 할 필요 없는데요. 다큐멘터리 제작만 해도 비용이 모자라서 사비를 써야 하는데요. 쓰레기가 넘쳐나는 그 행사장에 왜 예산을 그만큼이나 써야 합니까? 열쇠고리, 에코백, 종이 쪼가리들, 집에 가면 하루나 이틀 뒹굴다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그런 물건들 실컷 만들어서 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자원을 낭비하고 인력을 낭비해야 합니까? ‘쓰레기’란 말이 심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상호 언성이 높아졌다. 하네, 마네, 말이 많았다. 아무리 봐도 써야만 하는 그 금액을 빼고 나면 제작비가 모자라는 데서 더 모자라게 되는 건 둘째치고, 그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힘을 ‘낭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다. 내 논문도 다큐멘터리에 관한 정책과 지원에 관한 내용이고, 이에 대한 미주알고주알 전제와 목적과 목표와 기대의 내용들을 왜 모르겠는가. 쓰레기장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그것이 공급자와 수용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가능성이 있으며 어떤 동력이 될 거란 걸 왜 모르겠는가. 영화가 아니라면 상관없지만 영화는 좀 다르니까 답답해서 내뱉은 말이었다.
결과는 일단 분위기 좋게 마무리됐다. 나는 이 바닥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고, 울산을 너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예술인이 적응하기엔 이 바닥이 참으로 사악하다는 것이며, 이러한 내 사정을 이 사람들이 잘 이해를 해주는 내용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됐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른 선정자들은 오로지 박람회를 위해 질주하는 그런 모양새였다. 오롯이 두 개의 일을 하는 쪽은 나밖에 없는 듯 보인다. 아, 난 하는 일마다 어쩌면 이렇게 일이 늘어나기만 하고 주머니는 쪼그라들기만 하는 건지.
정말이지 서류에, 다큐멘터리에, 영화에, 논문에, 촬영에, 편집에, 시나리오에, 사람 관리에, 정말 죽어나는 중이다. 그래도 박람회 날은 다가오고, 양보해 달라고 해서 기꺼이 내 공간을 9제곱미터 양보하게 되면서 준비하던 일을 변경하고, 아무리 불만이 많았지만 하기로 한 일은 잘해야 한다는 고집은 있고. 그래서 시간을 접기 위해 공간을 구성하는 업체를 만나려 부산 벡스코로 넘어갔다.
마음이 급하니 앉은 자리에서 할 말을 후다닥 하고, 전문가의 눈으로 최선을 뽑아달라고 한 뒤 30분도 안 돼 일어났다. 선수들이 아닌 이들과 일할 땐 일뿐만 아니라 감정의 영역까지 고려해야 해서 항상 지치는데 선수들과 일을 하면 언제나 유쾌하다. 입력과 출력이 빠르고 부연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박람회장의 우리 영역은 도자 작품으로 구성한 반구대 재현과 포토존이다. 마구 만져도 되는 퍼즐형 암각화를 제작했고, 암각화의 캐릭터들이 매란국죽과 사계절 안에서 유영한다. 여기에 몇 가지 선물도 마련돼 있다. 그렇게 해야 한대서. 다만 설치하는 모든 작품은 비용을 지불하지 못한다. 사전에 좋은 평가로 승인받은 이 작품들은 내 아버지 작품이고, 가족 간에는 거래할 수 없다고 돼 있으므로. 그래서 재료비만큼만 아버지에게 사비를 썼고, 초대전으로 진행하게 됐다. 내 아버지는 이것 때문에 몇 달을 고생했으니까. 아버지는 내가 사비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알면 속상할 테니까. 그래서 내 호주머니는 바닥이 나고 있지만 서류상 일부 남는 비용으로 관람객 선물을 더 준비하기로 했다.
퍼즐형 암각화는 오롯이 포토존을 위해 암각화의 6분의 1 규격으로 재현해 제작한 것이다. 297개 조각을 알록달록하게 만들어 사진을 찍으면 예쁘게 나올 거다. 아직 열이 식지 않은 조각들을 분류해 붙일 땐 아버지, 촬영감독, 편집감독, 나까지 넷이 붙었다. 도록과 작품설명서는 만들어야 하니 작품 촬영을 한 뒤 퍼즐형 암각화를 완성하는 데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꼬박 열다섯 시간을 매달렸다.
이런 걸 쓰레기라고 말했다니. 내 말을 듣지 못한 다른 분들에게 미안합니다. 많이들 오셔서 사진도 찍으시고, 작품도 감상하시고, 작은 선물들도 받아 가세요. 다른 부스도 많이 둘러보세요. 11월 21일부터 24일까지 유에코에서 울주군청, 울주문화재단과 함께 조성된 울주군 전시장입니다.
오디션 겸 리딩 리허설을 진행하다
원래 리허설은 11월 11일 월요일부터 11월 13일 수요일까지 매일 두세 시간씩 3일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계약도 하지 않은 채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여러 차례 모으는 건 어려운 일이므로 하루에 몰아서 하기로 했다. 프로듀서는 시나리오가 최종본이 아니고, 앞으로 마음에 차는 더 많은 배우를 만나면 될 일이니 한 번에 결정하지 말라고 했다. 배우를 대할 때 이것만 기억하라고 했다. 아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쓰면 안 된다. 배우는 네 머릿속의 이미지를 만날 때까지 계속 가고 또 가라. 오라버니 면 상하지 않을까요? 상관없다. 네 뒤를 떠받쳐주는 게 내 역할 아니냐.
그래서 11월 13일 오전부터 저녁까지 리허설을 이어갔다. 배우들은 상황에 맞춰 오고 갔는데 평균 열 명 이상이 자리에 앉아 읽고 또 읽었다. 모두 서울 사람들이라 반구대 사투리가 영 어색했다. 서울 사람이 경상도 사투리를 말하면 전라도 사투리가 된다. 내 경험상 그렇다. 난 11년 반 동안 울산에서 지내고 5년간 반구대 사람들을 만나며 내 아버지도 울산 사람이다 보니 반구대 사투리에 귀가 트였지만, 배우들은 처음엔 대본을 읽기도 벅찼던 것 같다. 그래서 반구대에서 함께 올라간 이재권, 이영근, 손방수가 읽어주면 배우들이 따라 읽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배우는 배우였다. 한두 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금세 자기 것으로 만든다. 공감 능력이 정말 뛰어난 자들이다.
배우 지대한은 내 영화에서 ‘대한’ 역을 맡을 예정인데, 주연을 맡은 ‘하우치’(2024, 김명균)의 개봉 무대 인사 때문에 두세 시간만 자리에 있다가 사라졌다. 내가 바뀐 일정만 전하고 시간과 장소를 말하지 않아서 취소된 줄 알았단다. 그만큼 내가 정신이 없소, 빨리 와! 했더니 투덜투덜하더니만 빛의 속도로 자리에 나타났다. ‘하우치’는 첫사랑에 관한 소재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다. 울산에서는 CGV울산진장, 메가박스울산, 롯데시네마울산(백화점)에서 상영 중이니 많이들 봐주세요.
통화만 몇 번 했던 KBS의 H 감독과 이런저런 스태프들을 함께 만났다. 아우, 첫인상이 항상 안 좋아서 좀 씻고 가려고 했는데 이놈의 서류 작업으로 꼬박 밤새고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갔다. 게다가 한겨울에 입는 잠옷 원피스를 입고 갔는데 어찌나 더운지 목에 땀띠가 생기고 앉은 자리에 땀자국이 생길 만큼 땀을 흘렸다.
출발하기 몇 시간 전 잠시라도 눈 좀 붙이려고 했는데 전날부터 이어진 일 관계의 이런저런 만남, 12월 말에 있을 다큐멘터리 시사회 때문에 빠르게 진행해야 하는 편집, 박람회와 관련한 여러 준비와 서류 작업, 지원사업 기간의 종료가 다가오면서 정리해야 할 산더미 같은 서류들 때문에 한 줄만 더, 한 줄만 더, 한 게 밤새고 말았다.
어두울 때 출발해서 자정이 되어 도착했을 때 내 개 두 마리가 미친 듯이 펄쩍펄쩍 뛰며 반겨줬다. 땀과 근육에 켜켜이 쌓인 젖산으로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그래도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밥만 챙겨 먹이고 잘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도 또 서류, 또 서류 하겠지.
반구대 다큐멘터리는 손방수로 시작했다. 2020년에 촬영해서 끝내려고 했는데 마을 이야기를 이어가자고 제안한 이가 이재권이다. 그 과정에서 마을의 주요 인물인 이영근을 알게 됐다. 이들이 있어서 이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극장 스크린에 걸렸을 때 그 감정이란 지금의 이 벅참보다 훨씬 클 테지. 견뎌낼 수 있을는지. 이외에도 벼루 장인, 가야금 명인 등이 출연하게 될 거다. 다들 고맙고, 잘 만들어봅시다.
이민정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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