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발행된 더중앙플러스- 더 스토리 기사의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전쟁을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시인과 그 아내의 이색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가 들려주는 ‘백년의 사랑’은 더중앙플러스 구독(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16) 후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
1968년 6월 15일 밤, 서울 마포구의 언덕길에서 술에 취한 중년 남자가 버스에 치여 사망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시인 김수영(1921~68). 여섯 살 연하의 아내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기억을 간직한 채 홀로 지내고 있다.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그가 ‘백년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수영이 첫사랑에게 버림받고 방황하던 1942년 일본 유학 시절, 김수영과 동숙하던 이종구가 ‘사랑하는 조카딸’이라며 예뻐하던 김현경을 소개한다. 김현경은 이종구와 김수영을 모두 ‘아저씨’라 부르며 문학을 논한다.
김현경은 첫사랑 배인철 시인을 총격으로 잃는다. 남로당이었던 배인철을 우익이 제거했다는 설이 파다했지만 경찰은 치정사건으로 몬다. 이 사건으로 고립된 김현경을 김수영 시인은 가장 먼저 찾아와 “문학하자”고 말한다.
문학이 사랑이자 구원이었던 두 사람은 관습을 뛰어넘어 동거하고, 결혼해 아이를 갖는다. 그러나 아이를 배 속에 둔 채 김수영은 의용군으로 끌려간다.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포로로 붙잡힌다. 친공과 반공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던 포로들.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김수영은 생니를 하나씩 뽑는다.
“포로수용소는 서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내다버리는 무서운 곳이었어요. 김 시인은 영어를 잘하니까 병원에 있을 땐 미국인 병원장이나 간호사들과 대화가 되고 가깝게 지냈지만, 포로수용소에선 언제 당할지 모르거든요. 다시 병원으로 가려면 병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이를 다 뽑아서 밥을 못 먹으니까, 병원에 보내준 거죠.”
김수영은 부산 거제리 야전병원에서 통역을 맡았다. 병원장은 선물로 김수영 이름이 찍힌 미제 틀니를 만들어줬다.
포로수용소 밖의 풍경도 참혹했다. 김현경의 친정아버지는 1950년 9·28 수복 당시 혼란기에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부친의 그 많던 재산도 모두 다른 이의 수중에 넘어갔다. 피란처에서 아이를 낳은 산모는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김수영의 집안도 풍비박산났다. 동생 수경은 인민군에게 끌려갔고, 수강은 우익으로 몰려 처형됐다. 국군의 서울 수복을 얼마 남기지 않고서였다.
1952년 11월 28일, 오랜 포로생활을 마감하고 김수영이 석방돼 돌아온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김수영과 김현경은 2년3개월여 만에 극적으로 재회했다. 그러나 김수영은 1주일여 만에 일자리를 찾아서 문인들이 모여 있는 피란 수도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후 대구 미8군 수송관 통역 자리를 얻었다.
“살아야 하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영어 통역밖에 없는 거야. 그렇지만 이 양반이 통역 같은 직업을 좋아하지 않아. 결국 그만두고 부산에서 선린상업 야간부에 들어가 영어를 조금 가르치죠.”
김현경은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남편을 찾아 부산에 내려갔다. 김수영은 초량동 기찻길 옆 버려진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철길이랑 한 1m쯤이나 떨어졌나. 철도가 지나가면 집이 흔들렸어요. 판자에다 신문지 붙인 것도 다 떨어지고, 바로 아래는 시궁창이 흘러서 냄새는 나고. 하룻밤 자봤지만 겁이 나더라고요.”
남들이 다 선망하던 미군 통역관 자리는 비굴하다며 집어치우고 김수영이 선택한 삶이었다.
“도저히 여기는 안 되겠다 싶어서 취직 자리도 부탁할 겸 이종구에게 가 봤어요. 그랬더니 방이 두 개나 되고 부엌도 있더라고요.”
이종구는 서울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있다가 한국전쟁이 나면서 국군 통역장교로 징집됐다.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후방의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발령받았으나 임지에 부임하지 않았다. 쇠약해진 몸과 군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제대는 허락되지 않아 사실상 탈영병 신세였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탈영병 신분 문제를 해결하고, 임시수도 부산으로 이전한 서울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김수영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라며 아내를 놔두고 돌아갔다. 그 집에 살던 다른 서울고 선생은 김현경에게 방을 내주고 이종구와 한 방을 썼다.
이종구는 김수영과 함께 유학하던 시절, “둘 다 눈이 커서 닮았으니 같이 살아라”며 김현경과 김수영의 연애를 부추기는 말은 했지만, 내심 김현경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섣불리 사랑을 고백했다가는 ‘조카’와 ‘아저씨’라 부르던 인연마저 끊어질까 두려웠다. 전쟁이 터진 뒤엔 김현경의 생사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김수영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현경은 손끝이 야무졌다.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해치우고 청소를 하고, 방바닥에는 담요를 장판처럼 깔아 고정한 뒤 문풍지도 새로 발랐다. 대번에 번듯하고 멀쩡한 집이 됐다. 퇴근해 돌아온 이종구는 “이게 우리 집인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랫동네에 매일같이 미군 PX 쓰레기차가 왔어요. 사람들은 버려진 음식을 주워다 꿀꿀이죽을 끓여서 팔았어요. 거기 가면 접시도 있고 포크도 있고 살림살이가 많아. 그걸 주워다 싹 닦아서 쓰니까 나날이 집안 살림이 달라졌죠.”
서울고등학교 선생을 하던 조병화와 김광식까지 가세해 네 남자가 김현경이 차려주는 저녁을 먹곤 했다.
“오므라이스도 하고, 비빔밥도 해놓고. 그릇도 어지간히 짝을 맞춰 놓고 대접해 주니 아주 호강하는 거지. 우리 집에 오면 피란살이 같지가 않다는 거예요. 다들 좋아하니 나도 신바람이 나서 피곤한 줄도 모르고 더 재주를 부렸지. 그땐 20대였으니까.”
그러나 이종구가 알아온다던 일자리는 차일파일이었다. 아이를 봐주고 있던 친정의 생활비 문제가 걸렸다. 어머니와 아들, 동생까지 다섯 식구가 김현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된 이종구는 월급을 타면 반을 떼어 생활비를 부쳐줬다.
이종구와 함께 살던 서울고 선생은 둘 사이에 자신이 걸림돌이 된다고 느꼈는지 어느 순간 방을 뺐다. 한 집에 김현경과 이종구, 둘이 동거하는 상황이 됐다. 혹시나 김현경이 떠날까 봐, 이종구가 학교 수업을 빼먹고 집으로 돌아와 지키는 일도 있었다. 김현경의 고민이 깊어졌다. 홀로 고생하는 김수영을 생각하니 심경이 복잡했다.
“이종구가 친정 생활비를 대주니 큰 힘이 됐죠. 데리러 온다던 김 시인은 찾아오지도 않고, 찾아온다 한들 제대로 된 돈벌이도 없고,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웠고….”
그렇게 반년쯤 지난 어느 날, 김수영이 이종구의 집으로 찾아왔다. 막 밥을 먹으려던 차였다. 세 사람 모두 침묵했다. 밥알이 말라붙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김수영은 짧게 한마디 했다.
김수영의 “My soul is dark!” 한마디에 그날로 동거를 시작했던 김현경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선뜻 따라나서지 못했다. 이종구가 친정집에 생활비를 부쳐준 게 엊그제였다.
“제가 나중에 갈게요. 먼저 가세요.”
김수영은 이종구에게도 한마디 했다.
“자네가 이러면 안 되지!”
그렇게 단 두 마디를 던지고 김수영은 돌아섰다.
깔끔하게 떠났지만, 김수영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전쟁의 트라우마와 김현경을 잃은 상처는 그의 영혼에 새겨졌다. 술이 입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어머니에게까지 욕을 하고 행패를 부릴 만큼 처참하게 망가졌다.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김수영의 시 ‘너를 잃고’ 부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부산 피란 시절이 끝났다. 서울로 환도한 뒤에도 김현경은 한동안 이종구와 살았다. 이종구의 여동생과 머문 적도 있고, 남동생인 이진구의 집에 살기도 했다.
“이종구의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합류하니 아무래도 불편하고 어색했어요. 안 되겠다, 내가 뭘 좀 해야겠다 싶어서 성북동에다 방을 하나 얻어서 나왔어요.”
이종구에겐 알리지 않고 몰래 몸만 빠져나왔다. 골방에서 신춘문예 당선을 목표로 습작하기 시작했다.
염치가 없어 차마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1955년 봄을 맞았다. 문득 김수영에게 소식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김 시인의 아들이니까, 같이 키우는 게 옳겠다 싶었어요. 설마 하면서도 내 의사를 간단하게 써서 김 시인에게 보냈어요.”
다시 문학에 매진하고 있다고, 삼선교 빵집 건너편 다방에서 몇 월 며칠 오후 5시에 만나자고 엽서에 썼다.
만나자고 한들, 김수영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일부러 약속장소에 20분쯤 늦게 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