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 연구진, 그린란드 서부 호수 조사
단 1년새 호수 7400여개 붉은색 변해
땅에서 녹아 나온 탄소·마그네슘·철 원인
온난화로 눈 대신 비 오는 날 급증 때문
단기간에 수질 복귀 어려울 가능성 커
2023년 여름, 북극 근처 그린란드의 서부 도시 칸게를루수악에 있는 한 호수. 호수를 둘러싼 육지에서는 사람이나 인공 구조물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한적한 풍경에는 이유가 있다. 그린란드는 땅 면적이 210만㎢(남한 약 20배)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인데, 인구는 5만6000여명 밖에 되지 않아서다.
그런데 호수 색깔이 이상하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불그스름하다. 대규모 공업시설이 없는 그린란드에서는 특별한 오염원이 없고, 이 때문에 호수도 언제나 무색투명한데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이다. 문제는 이런 불길한 색깔 변화가 이 사진 속 호수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린란드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따뜻한 가을이 ‘변색’ 일으켜
지난달 말 미국 메인대와 영국 해리엇와트대 소속 과학자들을 주축으로 한 국제 연구진은 그린란드 서부에 있는 다수의 호수 색깔이 2023년부터 동시다발적으로 붉게 변했다는 분석을 발표했다. 원격 감지기와 현장 조사 등을 통해 알아낸 이 같은 이상 현상은 국제학술지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렸다.
이번 분석이 주목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색깔이 변한 호수 개수다. 무려 7400여개가 무더기로 붉게 변했다. 연구진이 조사 대상으로 삼은 거의 모든 호수의 색깔이 바뀌었다.
또 다른 하나는 색깔 변화에 걸린 시간이다. 2022년까지 무색투명했던 호수가 2023년에는 돌연 붉게 변한 것이 확인됐다. 변색에 딱 1년이 걸렸다. 호수 색깔은 지금도 회복되지 않고 그대로다.
연구진은 “이번처럼 많은 호수가 일제히 색깔 변화를 일으키려면 일반적으로 수백년이 필요하다”며 “전례 없는 일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이런 기이한 일은 왜 발생했을까. 연구진은 지구 온난화를 지목했다. 그린란드에서는 2022년 가을, 즉 9~10월에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북극권인 그린란드에서는 본래 가을이 되면 비보다는 눈이 주로 온다. 그만큼 춥다는 얘기인데, 2022년은 딴판이었다.
2022년 그린란드 9월 평균 기온은 평년보다 8도나 높을 정도로 더웠다. 가을이 사라지고 여름이 길게 이어진 셈이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9월 기준으로 2022년 그린란드 날씨는 1940년 이후 가장 따뜻했다”고 설명했다.
온화한 날씨가 만든 다량의 빗물은 그린란드의 꽁꽁 언 땅, 즉 영구동토층으로 잔뜩 스며 들어갔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에 따뜻한 물을 들이붓는 듯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영구동토층에 고정돼 있던 각종 물질은 빗물에 녹아 땅 밖으로 줄줄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물질에는 탄소와 함께 철, 마그네슘 같은 금속이 포함돼 있었다. 이 물질이 다량 유입되면서 단 1년 만에 붉은 호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붉은 호수는 그저 이채로운 볼거리가 아니다. 중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온난화 촉진이다. 호수 색깔을 붉게 만든 것이 온난화인데, 붉은 호수가 또다시 온난화를 부채질한다는 얘기다. 말 그대로 악순환이다.
이런 악순환이 일어나는 이유는 붉은색 호숫물이 햇빛을 가리는 선글라스 역할을 해서다. 연구진에 따르면 붉은 호수는 무색투명한 호수에 비해 물속으로 들어가는 태양광을 50%나 차단한다.
연구진 분석 결과, 붉은 호수에서는 태양광으로 에너지를 만들면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작용, 즉 ‘광합성’을 하는 미생물이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광합성을 하지 않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미생물은 늘어났다. 본래 이산화탄소 흡수 장치이던 호수는 되레 이산화탄소 배출 장치가 돼 버렸다.
호숫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그린란드에서는 색깔 변화가 다른 각도의 우려도 만든다. 연구진은 “호수에 함유된 각종 물질이 수돗물 생산 때 투입하는 염소와 만나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인 ‘트리할로메탄’을 생성한다”고 밝혔다. 주민 건강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문제는 붉은 호수를 만든 근본 원인인 지구 온난화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단기간에 저절로 물이 맑아질 가능성은 적은 셈이다. 연구진은 “호수에 대한 관찰을 이어갈 것”이라며 “호수 색깔을 되돌릴 방법이 있는지도 연구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