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연의(三國演義)’ 첫 회의 한 구절이다. 중국 역사에서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오랜 나뉨의 시대였다. 이를 진시황은 10년이 조금 넘는 정복 전쟁을 통해 마침내 하나로 합치고 통일 시대를 열었다.
통일 진나라는 법가 사상에 의지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형벌 규정이 촘촘하고 백성들에게 너무 가혹했다. 농민 세력이 주축이었던 ‘진승·오광의 난’으로 진나라가 다시 혼란에 빠진 것은 자업자득이자 필연이었다.
이번 사자성어는 적재적소(適材適所. 맞을 적, 재목 재, 맞을 적, 바 소)다. 앞 두 글자 ‘적재’는 ‘맞는 재목(材木)’이란 뜻이다. ‘적소’는 ‘맞는 위치’란 뜻이다. 두 부분이 합쳐져 주로 조직의 인사에서 ‘인재를 저마다의 품성과 재주와 능력에 맞는 직위에 앉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유방(劉邦. 기원전 256-195)은 평범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논두렁에서 조우한 용(龍)과 신체를 접촉했는데 이 장면을 부친이 목격했고, 그 후에 유방의 임신 사실이 확인됐다는 비현실적 일화가 존재한다. 유방이 미천한 신분에서 용으로 상징되는 지위로 급상승했기에 필요해진 허구일 것이다.
혼인 전에는, 성실하게 농업을 배우기보다는 지역의 혈기 넘치는 사고뭉치들과 어울리는 허풍쟁이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부친은 이런 유방을 내심 포기했고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타고난 임기응변과 끈질긴 근성이 이 시기에 충분히 숙성됐고 차츰 몸에 붙었다. 이 강점은 훗날 항우와의 대결에서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그의 목숨과 조직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다.
유방의 기질과 통일 진나라가 휘청거리는 시기는 썩 잘 어울렸다. 그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수하의 무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약 100명 규모 오합지졸에서 수만 병력으로 성장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세였기에 의지할 보스를 탐색하던 인재들도 차례로 유방의 진영으로 모여들었다. 여러 인재가 한 진영에 모이면 서열 문제도 복잡해지고 자리다툼은 당연히 생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유방은 항우보다 확실히 뛰어난 리더였다. 초한전쟁의 승패는 이 인재의 배치와 운용에서 선명하게 갈린다.
무장(武將) 가문의 후예였던 항우는 힘이 장사였다. 기병대(騎兵隊)를 거느리며 유방과의 대결에서 거의 매번 압도적인 전투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능한 책사였던 범증(范增)마저 유방의 반간계(反間計)에 속아 자신의 곁을 떠나게 할 정도로 인재 운용에 미숙했다.
유방이 비범한 ‘적재적소’ 능력을 스스로 설명해주는 일화가 존재한다. 유방이 항우를 자결하게 한 후, 황제로 즉위하고 연회 자리를 마련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가 질문한다.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혹시 압니까, 그리고 그토록 천하무적이던 항우가 천하를 잃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저런 대답에 유방이 자기 생각을 들려준다.
“군막에 머물며 계책을 짜서 천 리 밖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내가 장량(張良)만 못해요.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살피고 군량을 적시에 공급하는 일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죠. 백만 대군을 통솔하고 백전백승하는 일은 내가 한신(韓信)에 못 미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호걸 가운데 호걸입니다. 이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한 것이 바로 내가 이 통일된 중국을 얻은 비결입니다. 항우에게도 범증이 있었지요. 하지만 항우는 우리 계책에 속아 그를 떠나가게 했죠. 그것이 그가 패배한 이유입니다.”
인공지능(AI) 시대지만 인재를 알아보는 일은 여전히 생각처럼 쉽지 않다. 게다가 리더 입장에선 선택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안배하고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더 고난도 미션이 기다리고 있다.
유방의 이 고백이 아니더라도 구체적 현실에서 ‘적재적소’ 정답을 찾기란 그리 간단한 과제가 아니다. 사람과 조직의 업무 가운데 급소(急所)와도 같고, 여전히 가장 오류가 자주 발생하는 분야가 아닐까 싶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