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최근 화제와 함께 마무리된 “은중과 상연”이라는 드라마를 보셨는지요. 드라마에서 안락사가 다루어지는 방식을 보면서, 치과의사로서 그에 대해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딱히 입이 떨어지진 않더라고요. 그냥 좋더라는 아닌 것 같은데, 한번 살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익명>
본 칼럼에서 존엄사 및 안락사와 관련한 내용을 벌써 두 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10, “연명의료중단은 치과의사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42, “‘조력존엄사법’과 치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하지만 당시엔 이런 내용과 치과가 관련이 있다는 내용을 강조하느라 정작 사안 자체에 대한 설명을 드리지는 않아서, 한 번 더 생각해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여전히 치과의사와 존엄사는 “글쎄”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아직 임상에서 피부로 와닿는 일은 아니겠지요. 저희가 사망진단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실제로 의료법상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는 주체 중 한 명이지만, 보통 치과의사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말기 환자를 볼 일도 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부분은 제도적 미비 또는 부족이라고 생각하고, 점차 노인 환자 진료가 치과 영역에서 중요하게 되는 현재의 인구 변화에서 말기 상황의 돌봄과 죽음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치과의사도 점차 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꼭 환자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저희 자신이 겪고 준비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지난번에 단어 구분이나 정책적인 제안에 대해선 말씀드렸으니, 존엄사 논의를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 검토하고자 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존엄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에도 등장한 “은중과 상연”이라는 드라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극에선 오랜 애증(보다는 좀 더 악연에 가까운) 관계에 있는 두 여성 인물이 등장하고, 둘의 깊은 갈등을 해소하는 장치로 한 인물의 말기 암이 기능합니다. 얽힌 갈등을 서서히 풀어내는 대신, 억지로라도 갈등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으로 서사는 두 인물을 몰아넣지요. 그러기 위해, 이야기는 이미 한 인물의 종착역이 “안락사”, 스위스 여행과 약물 투여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음을 설정합니다. 한 인물의 결말이 정해져 있기에 다른 인물은 그 안에서 반응할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수용하거나 내치거나 둘 중 하나죠.
그리고 그 압축적인 시간선 안에서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통해 드라마는 관객에게 감정선의 빠른 해결을 제시합니다. 스무 해가 넘는 오랜 갈등, 좋아하는 사람에서부터 시작해 성취와 보상, 그리고 창작자에겐 가장 중요한 문제인 독창성의 인정에 대한 문제까지, 드라마는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끊어버린 것처럼 ‘안락사 여행’으로 모두 맺어버립니다.
서사로서 이런 해결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이런 빠른 해소가 소위 ‘사이다’로 작동한다는 거죠. 극 대부분은 따라서 두 사람의 감정선 해소를 다룰 필요가 없어지고, 오히려 두 사람이 어떻게 부딪히는지에 대해서만 극적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모든 문제는 소위 데우스 엑스 마키나,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마지막에 등장하여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기계장치의 신인 안락사가 해결할 테니까요.
극중 안락사 여행의 당위를 떠나, 이 구조가 저는 위태롭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설정과 서사가 한국 사회를 너무 잘 보여주고 있어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것은 우리의 압축 성장, 채 백 년도 되지 않아 K-컬처를 말하게 된 시간 경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한편, 우리가 갈등을 어떻게 처리해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요. 우리는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갈등은 파국으로, 죽음으로 마지막 순간에 억지로 해소됩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각자의 길을 가면 되고, 다른 사람의 삶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가깝게는 진료 환경에서부터 조금 멀게는 정치적 풍경에서까지 이런 정서를 관찰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삶이란 자신의 끝없는 추구이며 그 모든 감정과 갈등은 그저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일처럼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의 오랜 ‘무속’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원한이 남았으니, 그를 해소할 존재도 정당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화적 배경이라면 말기 돌봄이나 죽음에 대한 준비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무척 어려운 일이 됩니다. 사람들은 마지막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동안의 감사와 사랑을 표현할 필요도, 슬픔과 아픔을 정리할 이유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망자가 가지고 갈 테니까요.
적어도 저에겐 좋은 모습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아마, 이런 형태의 마무리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소위 ‘웰다잉’을 생각하시는 것 같고요. 사실, 노년기의 생존이 담보되지 않아 빠르게는 육순부터 챙겨왔던 우리 전통에서 삶을 정리하고 마무리를 준비한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많은 분은 삶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고, 은퇴 이후에도 삶과 생활이 있음을 많은 분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죽음 또한 준비되어야 할 무언가, 심지어 말기 질병 앞에서도 죽음은 정리와 마무리를 요청하는 하나의 단계로 다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이야기에서 조금 길게 돌아왔습니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급작스러운 죽음’은 한국(또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전 여주인공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담던 드라마는 (2000년대 초의 “가을동화” 같은 드라마를 아직 기억하실지요) 이제 말기 암과 안락사를 장치로 해서 죽음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드라마에선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잔여를 관객이 곱씹게 만들어 극적 여운을 남기는 장치로 활용될 수 있을진 모르나 현실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적절치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존엄사-안락사의 제도로서의 논의를 흐리는 환상으로 작동하기에, 드라마의 설정을 현실에 그대로 옮기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무리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은 다른 주체보다도 일단 의료인이어야 합니다. 임상과 제도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 없이 막연한 ‘해결책’으로, 심지어 전통적인, 그다지 온당치 않은 정서를 다시 회귀시키는 움직임으로 안락사가 다루어질 때 그에 대해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전문가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회에서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낼 수 있고 보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한 사람의 치과의사로서 의견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진료하시거나 치과의사로 생활하시면서 가지셨던 윤리와 관련한 질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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