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는 의사이자,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 마약 중독자였다. 아버지를 원망하던 아들은 아버지처럼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 스스로 ‘실패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며 아트 딜러로 직업을 바꾼 후였다. 새벽까지 클럽에서 미술 작품을 팔고는 정신을 잃기 일쑤였지만 다음날 손등에 적힌 ‘2만5000달러, 15% 할인, ABC(판매자의 이니셜)’만 읽을 수 있으면 문제 없다고 생각했다. 만류하는 아내에게는 “술은 엉망인 내 인생을 겨우 버티게 하는 약”이라고 둘러댔다.
10여년 전 그날도 두 살이 채 안 된 아이들을 뒤로 한 채 작업실로 향했다. 셔츠를 벗고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들으며 보드카 한 병을 비웠다. 취기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한참 후 깨어난 그는, 여기저기 부딪혀 엉망이 된 몸을 보며 깨달았다. 예술을 한다는 핑계로 자신을 상처 입혀왔다는 것을.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결심하며 그날부터 새롭게 붓을 들었다.
알코올 중독자에서 미술계 블루칩으로
지난 2일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에서 개인전을 시작한 미국 작가 조엘 메슬러(51)의 이야기다. 2017년 유망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미국 ‘나다(NADA·New Art Dealers Alliance) 마이애미’에서 처음 주목 받은 그는 202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작품 ‘To Life(인생에게)’가 90만 7200달러(약 12억 6800만원)에 낙찰되며 ‘미술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이후 뉴욕 록펠러 센터, 프랑스 샤토 라 코스테, 뉴욕 레비 고비 다얀, 상하이 웨스트 번드 롱 미술관 등 전세계 유명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내에서도 2022년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에 내놓은 작품 12개가 ‘완판’되는 등 유명세를 탔지만, 개인전을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시에는 메슬러가 만 2년 간 준비한 회화 신작 19점과 입체 작품 1점 등 총 24점이 나왔다.

트로피컬 색채, 경쾌한 화풍과는 달리 메슬러의 개인사는 꽤 어두웠다. 부모의 이혼, 예술가로서의 좌절, 알코올 중독의 과거는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전시를 계기로 한국을 찾은 메슬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작품은 나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박 풍선, 태양, 바다, 무지개, 비치볼, 바나나 잎, 꽃…. 여러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은 유년기의 행복과 불행의 편린들이다. “예를 들면 바나나 잎은 가족과 자주 아침 식사를 했던 비벌리힐스 한 호텔의 벽지에서, 물의 이미지는 어머니가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열어주던 수영장 파티에서 기인했습니다. 행복한 기억이었지만 때론 상처가 되기도 했던 모티프(motif·반복되는 요소)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다시 일어날 힘과 용기를 얻었죠.”

작품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짤막하고 선명한 타이포그라피다. 주로 ‘Love(사랑)’ ‘Joy(즐거움)’ ‘Sunrise(일출)’ 등 쉬우면서도 특정 이미지나 풍광이 연상되는 단어, 문구들을 활용했다. 이 역시 작가 자신의 경험, 추억과 관련이 깊다. 메슬러는 “‘The world is yours(세상은 너의 것)’, You deserve great thing(너는 멋진 걸 누릴 자격이 있어) 등의 텍스트는 어머니가 어린 나를 재우며 항상 하시던 말”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자기고백의 서사는 메슬러의 작품이 전통적인 팝아트와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전동휘 파라다이스시티 아트팀 디렉터는 “메슬러의 작품은 선명한 색감, 반복적인 패턴, 타이포그라피 등 팝아트의 시각 언어를 분명히 이어받고 있지만, 그림 속 단어와 문장은 전통적인 팝아트에서 차용되는 광고 문구나 만화 속 대사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감정, 기억에서 나온 것들”이라며 “개인의 서사를 회화적 언어로 바꿔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낙원은 바로, 지금, 여기”

이번 전시의 주제는 ‘Paradise Found(발견된 낙원)’다. 작품들은 작가 본인이 낙원을 찾아 나선 여정 순으로 전시돼있다. 전시관은 Earth(땅), Water(물), Sky(하늘) 총 세 가지 테마로 나뉘었다. 메슬러는 “땅은 두 발을 딛고 안정감을 찾는 출생의 단계, 물은 어린 시절 환상의 세계, 하늘은 성찰과 자기발견을 상징한다”며 “내 삶의 여정과 예술적 성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때 소중한 것을 잊고 방황했던 메슬러에게 파라다이스는 어떤 의미일까. 그는 “언젠가 도달해야하는 종착점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절대 돌아오지 않습니다. 모든 순간이 특별합니다. 어딜 갈 필요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이 자리가 파라다이스입니다.”
전시는 파라다이스시티 아트스페이스에서 내년 2월22일까지 열린다. 입장료는 성인 7000원, 어린이 4000원이며 파라다이스 투숙객이나 멤버십 회원 가입 시 무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