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물경 30년이 된 영화 ‘스피치리스’(미국 개봉 1994년 한국 개봉 1996년)를 소환해서 생각하면 미국사회가 우파 남자, 좌파 여자의 갈등과 대립 문제를 고민한 것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젠더의 이념 대결이 요즘 우리에게서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30년 전 할리우드 영화는 이에 대한 해법을 어떻게 제시했을까.
주인공 케빈(마이클 키튼)과 줄리아(지나 데이비스)는 뉴멕시코주 한 호텔의 기념품 가게에서 우연히 부딪히며 서로에게 끌린다. 남자는 텔레비전 시트콤 작가로 자신을 소개한다. 여자는 리포터, 그러니까 기자라며 악수를 나눈다. 이게 꼭 거짓은 아니다. 둘 다 자신의 예전 직업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직업은 서로가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남자는 공화당 정치인 레이 가빈을 위해서, 여자는 민주당의 로이드 워너메이커를 위해 일하는 스피치 라이터, 곧 연설문 작가이다. 레이 가빈, 로이드 워너메이커 모두 뉴멕시코 상원의원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중이다.
미국도 우파 남자, 좌파 여자 갈등 고민
케빈과 줄리아는 당연히 사사건건 부딪힌다. 이 영화가 나왔던 1994년의 미국은 빌 클린튼 1기 행정부 2년차였다. 중도 노선으로 24년만에 공화당에 정권을 뺏어 왔고 46살 최연소로 대통령이 된 만큼 초기의 빌 클린튼 정권은 기대도 많았지만 논란도 많았다. 모든 정책의 입안 과정을 놓고 클린튼은 의회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의 하원의장 뉴트 깅리치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그같은 정치적 대립은 영화 ‘스피치리스’에 고스란히 표현된다. 공화당 정책을 사수하려는 케빈과 민주당 정책 옹호론자인 줄리아는 어쩔 수 없이 티격태격, 부딪히게 된다. 짐작하겠거니와 영화 속에서 논리적으로나, 지식과 교양 면에서나, 여자가 남자보다 조금 더 세련되게 느껴진다. 남자가 조금 딸린다. 그는 늘 비아냥대고 조소를 보낸다.
그러나 이 둘의 문제는 각자가 지닌 성격보다 정치와 사랑이 양립할 수 있느냐가 더 본질적인 것이다. 연설문 작성자는 자신의 후보가 지닌 중요한 정보를 가장 최우선으로 관리하는 위치에 있다. 각각 상대방 후보 진영의 최선봉자가 같은 침대에서, 같은 베개를 쓰면서 그 정보를 흘리지 않는다? 당연히 서로의 진영에서 자칫 이 남과 여를 상대의 스파이로 몰 가능성까지 생긴다. 영화에서는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기도 한다. 모든 걸 다 떠나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믿는 정치사회경제적 가치를 두고 사사건건 벌어지는 말싸움에 완전히 지치고 만다. 남자와 여자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여자는 남자의 보수 성향을 깎아 내리고 남자는 여자가 건방지고 잘난 체 하며 도무지 양보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동안 국내에서도 인기를 모았던 TV드라마로 미국에서는 2010년부터 2024년까지 무려 14년간 시즌 14개가 방영된 ‘블루 블러드’ 역시 보수적인 남자(들)와, 똑똑하고 현명한 여자(들)의 대립 구도가 기본 축 중에 하나이다. 드라마는 4대째 경찰을 하고 있는 한 가족의 얘기이다. 아버지 프랭크 레이건(톰 셀렉)은 뉴욕경찰(NYPD)청장이다. 아들 대니 레이건(도니 월버그)은 NYPD의 강력반 형사이며 딸 에린(브리짓 모나한)은 뉴욕 검사이다. 에린은 아이비 리그인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포드햄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이다. 오빠는 몸을 써서 범인을 잡지만 여동생은 늘 기소 여부의 정당성, 증거 채취의 적법성 등을 놓고 논쟁을 벌인다. 둘의 쟁점은 가족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아침 식사 혹은 저녁 만찬으로까지 옮겨 간다. 가족 내 남자, 특히 대니는 세상을 논리대로만 살아 갈 수는 없다면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내세우곤 한다. 유리 천정을 뚫고 지방검사 자리까지 오른 동생 에린은 그런 오빠가 당연히 못마땅하다. 이 둘의 말싸움, 격렬한 남녀 노선 싸움의 중재자는 아버지 프랭크이다. 종종 대니의 아내 린다(에이미 칼슨)가 나서지만 간호사였던 그녀는 환자 후송 도중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고 만다(시즌7). 남녀 문제에 있어 선진국처럼 보이는 미국 역시, 이 시리즈가 진행됐던 14년 동안 이렇다 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블루 블러드’는 상당히 보수세가 강한 분위기의 작품이지만 가족 내 젠더 갈등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만큼 민감한 이슈라는 얘기다.
한국에서는 쉽게 이런 남녀 캐릭터의 대립 구도를 보여 주는 드라마를 기획하지 못한다. 지난 10여 년간 거의 유일했던 작품이 2013년 SBS가 방영했던 ‘내 연애의 모든 것’이다. 2013년은 박근혜 정부가 집권 중반을 넘어서면서 국정의 난맥상이 서서히 드러나던 때였다. 이듬해 세월호 사고가 터졌다. 드라마 ‘내 연애의 모든 것’은 보수당(당시의 한나라당을 비유)의 국회의원, 남자 김수영(신하균)과 진보적 정당(당시의 통합민주당을 비유)의 국회의원, 여자 노민영(이민정)이 비밀연애를 시작하지만 국회에서나 사생활에서나 목에 핏대를 세우며 격렬하게 싸운다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현실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가 높아지면서 비현실적이라는 지적과 비판에 휩싸였고 결국 평균 5% 안팎의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도 남자는 보수의 길을 걷고 여자는 진보적 태도를 지향한다는 경향성이 고착화되고 있다. 당연히 이들 영화나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한남동 탄핵 찬반 시위의 진영도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과 빨간 신호봉을 흔들어 대는 20대 남성으로 갈리고 있다. 2030 여성과 20대 남성들의,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는 정서의 수준은 날이 갈수록 높아 가고 있어 기성 세대는 이를 매우 우려하는 시선으로 바라 보고 있는 상황이다. 요즘의 젊은층 남녀는 서로 연애를 하지 않고 사랑을 하지 않으려 한다. 당연히 결혼을 기피하고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출산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화이트 칼라층의 진보적 여성과 블루 칼라층의 보수적 남성들의 대립은 사회 문제이자 국가적 문제가 됐다.
진부하지만 해법은 사랑밖에 없을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민주당 골수 지지자로 유명한 로브 라이너 역시 1995년 ‘대통령의 연인(The American President)’으로 ‘보수 남자-진보 여자’의 얘기를 찍었다. 현존하는 시나리오 작가 중 가장 정치적 수준이 높다는 아론 소킨(시즌 드라마 ‘웨스트 윙’으로 유명하다)이 쓴 작품이다. 주인공은 공화당 대통령 앤드류 쉐퍼드(마이클 더글러스). 그는 홀아비 대통령이어서 주위에 여성들이 있을 때마다 파파라치의 카메라 세례를 받는다. 그런 그가 반하는 여성은 환경 운동가이자 로비스트인 시드니 웨이드(아네트 베닝)다. 영화 초반 시드니는 대통령의 구애에 대해 ‘내가 왜?’하는 반응을 보인다. 공화당은 자고로 환경문제에 관한 한 ‘꼴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엉뚱한 남 vs 똑똑한 여’ 구도가 대세로
그러나 영화는 영리하게도 정치나 정책 이슈로 두 주인공을 심하게 싸우게 만들지 않는다. 대통령 앤드류가 공화당 내 정적의 공격을 받고 시드니가 이를 지켜주는 과정에서 사랑을 완성시킨다. 맞다. 이 영화는 로맨스 판타지다.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스마트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가졌던 기획의도는 그렇게 해서라도 정치적 진영이 다른 남성과 여성, 여성과 남성이 극렬하게 대립하는 것을 지양해 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기사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민주당의 전통 가문인 케네디 가의 마리아 슈라이버(존 F케네디의 누이동생 유니스 슈라이버의 딸. 외조카이다)의 결혼도 있긴 했었다.
최근의 할리우드 영화는 남녀간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 공화당-민주당 식의 진영 개념을 아예 도입하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대립 구도를 만들어 내는 셈이라 보기 때문이다. 다만 ‘좀 엉뚱한 남자 vs 아주 성공한 똑똑한 여자’의 구도가 대세다. 2019년 영화 ‘롱 샷’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준비 중인 출중한 능력의 외교관 여성 샬롯(샤를리즈 테론)과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남자 프레드(세스 로건)의 얘기를 다룬 정치 로맨스이다. ‘롱 샷’처럼 일부러라도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다. 결국 이념과 정치적 태도의 문제도 구체적인 삶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좁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서로를 존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 대중문화가 담당해야 할 몫이다. 젊은이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영화와 드라마의 시대적 소명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