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내 정치 지형이 흔들리고 있다. ‘빅3’ 국가인 영국·프랑스·독일에서 극우·포퓰리즘 정당의 지지율이 사상 최초로 나란히 1위를 기록하면서다. 세 나라 중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프랑스다. 긴축 재정안을 추진하던 총리가 극우·포퓰리즘 정당을 비롯한 야당 반발에 불신임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에선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이 지난해부터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30%가 넘는 지지율로 1위를 달리고 있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엘라베가 지난 7월 발표한 결과에선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가 대선에 나설 경우 대선 1차 투표에서 36% 지지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측됐다. 지난 202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승리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기록(27.9%)을 넘는 수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RN의 차기 대선 후보가 마린 르펜 의원(전 RN 대표)일지 바르델라 대표일지 알 수 없지만 누가 되든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영국에선 포퓰리즘 성향의 영국개혁당이 지지율 선두다. 지난 5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29%를 기록, 집권당인 노동당(22%), 제1야당 보수당(16%)보다 앞섰다. 현재 의석은 현재 5석(총 650석)에 불과하지만, 지지율 추세대로라면 2029년 총선에서 원내 1당으로 올라설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독일에선 극우 정당 독일대안당(AfD)이 연초부터 집권 여당인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과 접전을 벌이다 최근 선두를 달리고 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진행된 여론조사기관 포르사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AfD는 26%의 지지율로 기민·기사 연합(25%)을 앞섰다.

이탈리아·네덜란드 등 다른 유럽 국가에선 이미 극우·반이민 정당이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큰 영국·프랑스·독일에서 극우·포퓰리즘 정당이 나란히 지지율 선두를 기록하며 집권 가능성이 커진 건 사상 처음이다.
정치 지형 변화의 원인은 다른 유럽 국가와 다르지 않다. WSJ는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 후 유럽에서 이민자가 늘고 물가가 급등하면서 시민 불만이 커진 것을 주요 이유로 본다”고 전했다. 지난해 영국에 접수된 망명 신청 건수는 10만8100건으로 전년 대비 20% 늘었다. 불법 입국자 수는 8월 말 기준으로 올해만 2만 9000명이나 된다. 특히 최근 에티오피아 출신 망명 신청자가 14세 소녀를 성폭행한 사건으로, 영국에선 대규모 반이민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독일 역시 해외 출신 거주자 비율이 2017년 15%에서 2024년 22%로 치솟았다. 프랑스에서도 지난해 말부터 국경 통제를 강화하는 이민법이 필요하다며 새 정부의 이민법 개정 방침에 지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면 경제는 수년간 성장이 정체된 가운데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여론 양극화는 반(反)엘리트 정서를 키웠다. 컨설팅회사 맥라티 어소시에이츠의 제레미 갈롱 유럽 담당자는 “경기 침체와 급격한 이민이 결합한 악순환이 유권자를 기성정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끌었다”며 “영국의 작은 도시부터 프랑스 시골, 독일 마을까지 많은 시민이 전통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얕잡아본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을 타고 극우 정당들은 보다 반이민 정서 자극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영국개혁당은 집권 시 5년 이내에 불법 이민자 60만 명을 추방하겠다는 대책을 꺼내 들었다. 독일 AfD는 불법 이민자 추방과 독일의 유럽연합(EU) 탈퇴, 홀로코스트 추모 문화 재검토 같은 급진적 의제를 내세웠다. 프랑스 RN도 반이민·반이슬람 담론을 앞세우고 있다.
설상가상 총리 불신임 위기…극우당, 정치적 수혜
당장 선거를 앞두고 있지 않은 영국·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극우 돌풍의 여파가 정계를 흔들 수 있다.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의 불신임 위기로 정부 내각이 붕괴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바이루 총리는 지난해 기준 3조3000억 유로(약 5400조원)에 달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113% 수준인 공공부채를 해결하고자 지난달 15일 국방 예산을 제외한 지출 동결, 법정 공휴일 폐지 등이 담긴 재정 긴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여론과 야당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바이루 총리는 오는 8일 신임 투표로 정책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승부수를 띄운 상태다.

하지만 프랑스 매체들은 바이루 총리의 시도를 ‘자살 행위’로 평가한다. 의회 다수를 차지한 좌우 진영 야당이 불신임에 표를 던질 확률이 높고, 바이루 내각이 취임 9개월 만에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벌일 수 있지만,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RN 등이 선거에서 약진해 의회 주도권을 더 장악할 수 있다. 후임 총리를 지명한다고 해도 야당의 반대를 뚫기가 쉽지 않다.
바이루 총리는 지난달 31일 BFMTV 등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투표의 쟁점은 총리나 정부의 운명이 아니라 프랑스의 운명”이라며 정치권에 책임 있는 판단을 촉구했다. 그는 현재 상황을 “선체에 구멍이 뚫려 물이 들어오는 배”에 비유하며 정부가 무너지면 국가의 미래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