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사 딸에게 전하는 밥의 인문학
영양사 딸에게 전하는 밥의 인문학
김기수 교수 전주기전대학
김기수 교수님은 지난 38년간 우리 농업·농촌 진흥을 위한 공직에 매진하다 퇴직한 후, 지금은 전주기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농부들의 고충과 우리나라 미래 농업을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로봇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시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인간의 존재가 흔들리는 시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영양사로 살아가고 있는 외동딸에게 평생을 우리 농업과 농촌만을 바라보며 산 아빠가 24번의 메시지를 전한다. 누군가 인문학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 라고 했다. 인간은 그냥 사는 게 아니라 하나의 큰 무늬, 하나의 결 위에 산다는 의미다. 영양(교)사로서 그냥 일하는 게 아닌, 누군가에게 따뜻한 한 끼를 전하는 영양(교)사들을 위해 ‘밥’에 대한 무늬를 1년간 그려 나가고자 한다.
우리 벼, ‘토종벼’는 어디에 있을 까. 1914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 르면, 당시 한반도에서 조사된 토 종벼 품종은 1451종이었고, 재배면 적은 전체 97%에 달했다.
까투리찰(청록색), 화도(붉은색), 조동지(노란색), 흰배(흰색), 북흑 조(검은색) 등 다소 생소한 이 단어 들의 정체는 수천 년 동안 우리 땅 이 키운 토종벼 품종의 이름들이 다. 그런데 그 많던 토종벼는 현재 우리 식탁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5000년을 이어온 우리 토종벼가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불과 100년 전이다. 일본의 일제강점기 내내 한반도의 쌀 생산량을 늘려 일본으 로 가져가고자 다수확 품종의 농사 를 강요했었기 때문이다.
이때 많은 토종 품종이 사라졌고 1970년 초까지 우리는 매년 쌀 수 확량이 충분하지 않아 ‘보릿고개’ 라 불리는 심각한 식량부족 시기 를 겪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주요 식량인 쌀을 자급하는 일이 국가의 최우선 정책과제가 됐고, 1970년대 에 들어서며 토종벼에 비해 생산량 이 30%나 많고 병충해에도 비교적 강한 개량종 ‘통일벼’를 전국적으 로 보급하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 토종벼는 다 시 한번 설 자리를 잃어 유전적 다 양성을 소실해 결국 고유 품종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우리 토종벼와 개량종의 차이를 살펴보면, 첫 번째 토종벼는 개량 종에 비해 키가 크다. 토종벼는 햇 빛을 둘러싼 풀과의 경쟁에서 이기 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화학비료 없던 시절 땅의 양분을 최대한 얻 기 위한 깊은 뿌리 내림의 영향으 로 키가 많이 자랐다.
두 번째 토종벼에는 ‘까락’이 있 다. 이 까락은 벼 온도와 수분을 조 절하고,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며, 야생 상태에서 종자를 퍼뜨 리는 놀라운 역할을 했다.
까락은 까끄라기의 준말로 벼, 보리 따위의 낟알 껍질에 붙은 깔 끄러운 수염을 말한다. 알맹이의 싸개 껍질이나 받침껍질의 끝부분 을 털 모양으로 길게 키워 자기 씨 앗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간혹 새 들이 나락과 함께 까락을 먹으면 목에 걸려 죽기 일쑤다.
세 번째 ‘흑갱’은 검은 수염, ‘자광 도’는 자색 빛의 까락 색에서 붙여 진 이름이며, ‘북흑조’는 함경도에서 자란 벼로 고향과 이름이 있다.
토종벼 중에 ‘자치나’는 이삭이 까투리 깃털처럼 생겨 ‘꿩찰’로도 불리는데,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 유기농으로 재배하기 좋은 찹 쌀이다. 특히 색이 예쁘고 찰기가 좋으며 독특한 향이 있어 약밥이나 강정 같은 요리에 활용하기 알맞다.
‘녹두도’는 남아 있는 토종벼 가 운데 역사가 가장 길며 녹두처럼 연한 초록색이라 밥을 지어도 곱 다. ‘자광도’는 현미로 도정하면 이 름처럼 붉은 낟알이 드러나 색감이 예쁘고, ‘돼지찰’이라는 벼는 찹쌀 로 떡을 해도 잘 굳지 않아 유용하 다. 그리고 ‘불도’는 임금이 먹던 쌀 이었다.
이러한 토종벼가 사라져 갔지만 토종벼 씨앗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국가기관과 단체의 움직임이 있지만, 개인들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도 한다. 개인 으로는 ‘토종 씨앗의 역습’이라는 책을 펴낸 김석기씨와 우보농장을 운영하며 280여 종의 토종벼를 키 우고 거두는 이근이 농부 같은 사 람들이 있다.
토종벼는 자라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에 맞춰 최적의 상태로 토착화 된다. 따라서 토종벼에 농약을 치 면 알이 너무 많이 달려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농약이 오히려 해가 된다. 또한 까락은 수확량 보 존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토종벼는 건 강하게 살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욕 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최상의 식자재일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다양한 맛과 색으로 우리의 까다로 운 입맛을 책임져주기에 충분하다.
현재 토종볍씨는 농촌진흥청 국 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센터 에 450여 종 보관되어 있다. 비록 예전에 비해 종자 수가 많이 줄었 지만, 토종벼의 보존 및 부활로 건 강한 식단은 물론 유전적 다양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뿐만 아니라 심각한 기후변화 와 환경 파괴로 급기야 식량안보까 지 위협받고 있는 지금, 우리 종자 주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더더욱 필요하다.
지난 5000년의 농경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토종벼는 진정 민족적 힘 의 원천이자, 나아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