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코드(ICD-11)에 등재한 지 6년이 지났지만 이를 자국 질병 분류 체계에 공식 반영한 국가는 아직 없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국내에서는 보건복지부와 통계청이 국제 기준 준용을 이유로 도입을 추진 중인 반면 다수 국가는 자국 보건 정책과 통계 목적에 맞춰 ICD 체계를 수정·운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예원 이화여대 교수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에서 열린 '게임과학심포지엄'에서 “12개국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모든 국가가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으로 진단하고 입력할 수 있는 체계를 아직 도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진 교수는 “조사 대상 국가 모두에서 게임이용장애는 자국 질병 분류 체계에 아직 등재되지 않았고, 이는 공식적으로는 이 진단을 내려서 입력할 수는 없다는 뜻이 된다”며 “WHO 등재 이후 각국에서도 나름의 고민이 이어지고 있지만 대부분은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조사에 참여한 국가들은 자국 보건정책에 따라 WHO의 ICD를 변형해 사용하고 있었다. ICD-10 영어판을 그대로 사용하는 말레이시아, 인도 외에는 대부분 자국 실정에 맞게 수정·개정한 질병 분류 체계를 갖췄다. 미국과 중국은 정신질환에 대해서는 별도의 체계를 운용 중이다.
게임이용장애에 대한 해외 전문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진 교수는 “ICD-11에서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한 것에 대해 여섯 나라에서는 '굉장히 부정적이다'라는 의견을 줬고 3개국에서는 '조금 더 신중한 접근은 필요하지만 찬반 입장을 말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공통적으로 지적된 사항은 과학적 근거 부족, 개념의 모호성, 광범위성으로 인한 오용과 부작용의 가능성 등이다. 진 교수는 “게임을 많이 하는 것이 하나의 증상일 수는 있지만 그 원인이 자폐 스펙트럼이나 ADHD, 불안장애, 우울증 등 기존의 기저 질환일 수 있기 때문에 게임만을 대상으로 치료하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의견도 많았다”고 강조했다.
국가별로 프랑스에서는 2019년에 WHO가 질병코드에 게임이용장애를 등재하면서 갑자기 사회적 혼란이 확산됐다. 트레이닝되지 않은 집단에서 비경제적인 게임 이용자들을 과도하게 낙인화하는 사례들이 발생했다. 핀란드에서는 용어 자체가 논쟁거리였다. 스페인에서는 처음 뉴스에 잠깐 보도되긴 했지만 사회적 관심이 매우 빠르게 사라졌고 국가적 우선순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진 교수는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으로 등재하는 것은 단순히 보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정의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문화적이고 정책적인 선택”이라며 “이건 어떤 의미에서 인류가 기술이나 미디어, 문화를 병리화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2025 게임과학심포지엄은 게임문화재단 산하 게임과학연구원과 디그라한국학회가 함께 마련했다. '다면적 플레이어: 게임 플레이의 다양한 층위들'을 주제로 국내외 저명한 게임 연구자가 게임 플레이어의 행동과 심리를 놓고 논의했다.
'쾌락주의 관점의 게임 플레이어'를 주제로 발표한 윤태진 디그라한국학회장(연세대 교수)은 게임 플레이어가 느끼는 '즐거움'을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한 '쾌락 복지'로서 게임의 역할을 제시하고 즐거움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관점의 게임 연구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정은 기자 je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