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 도와줄테니 2000만원 달라"…정치신인 유혹하는 '브로커'

2024-10-21

#. 2022년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A정당 소속으로 서울시의원 출마를 준비하던 이모 씨에게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양모 씨가 찾아왔다. 양씨는 “회장님이 출마할 수 있게 공천해줄 테니 2000만원을 달라”고 했고, 김씨는 양씨의 지인에게 2000만원을 송금했다. 하지만 공천을 못 받은 김씨가 불법 공천헌금 사실을 고발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양씨는 지난해 10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이 최종 확정됐다.

명태균씨가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면서 정치인과 정치브로커의 관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치브로커는 선거를 도우면서 만든 인맥을 바탕으로 이권을 노리고, 차후 공천 등에 개입하는 이들이다. 여론조사 업체와 인터넷 매체 대표로 활동한 명씨는 여론조사를 무기로 유력 정치인에게 접근해 선거 전략부터 공천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토호 세력이 강한 지방일수록 정치브로커가 판을 친다”고 전했다.

①어떻게 접근하나

지역 건설업자, 직능단체 대표, 지역 매체 간부, 정당 출신 등 조직·돈·인맥을 가진 사람이 작심하면 브로커가 된다. 지역에 연고가 없는 정치 신인이 정치브로커의 1차 타깃이다.

이들은 무작정 후보를 찾아가 실세라고 설레발치기도 하지만, 학연·지연·혈연이 연결고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 명망가 추천이나 동문 등의 인연을 내세우면 출마자도 만남 자체를 거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소속으로 광역의회 의원을 지낸 한 정치권 인사는 “처음 출마했을 때 ‘내가 고등학교 선배’라면서 여러 명이 찾아왔다”며 “‘산악회 몇 개를 관리한다’, ‘국회의원과 친하다’며 나를 당선시켜주겠다고 하는데, 이때 덜컥 도움을 받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고 했다. 명씨는 창원 지역의 정치인과 두루 사귄 다음 윤석열 대통령 부부에게까지 연결된 케이스다.

정치브로커가 정치 신인을 공략하는 무기는 연락처다. ‘경선=당선’인 여야의 텃밭일수록 당원 명부나 지역 유권자의 휴대전화 번호는 선거 운동의 핵심 자료다. 정치 신인이 자신을 알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개별 문자 발송이지만, 조력자가 없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유권자 전화번호를 구하기 어렵다. 정당 출신이 가진 당원 명부나 지역 유지로 활동하면서 산악회·동호회 등에서 확보한 연락처가 요긴하게 사용된다. 국민의힘의 한 중진 의원은 “선거 때 ‘전화번호 몇천 개 담겨있다’며 USB를 사라는 제안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②선거 기획에 여론조사, 홍보까지…패키지로 진화

선거 전략의 중요성이 조직 선거에서 공중전으로 옮겨가면서 정치브로커도 진화했다. 특히 2022년 20대 대선을 거치면서 급증한 거대 양당의 당원들이 선거 지형을 바꿨다. 단순히 소수의 당원명부만으로 선거에 큰 영향을 주기 어렵다 보니, 선거 컨설팅으로 변모한 것이다.

정치권에선 선거의 ‘A to Z’를 맡는 컨설팅을 ‘부티크(boutique)’라고 부른다. 부티크란 원래 고급패션 샵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지만, 기획·홍보·여론조사 등을 한 번에 해주는 것을 뜻하는 은어로 사용된다. 정치 신인들에게 이들은 우군의 역할을 한다.

일부 컨설팅 업체들은 선을 넘기도 한다. 이상직 전 민주당 의원은 21대 총선에서 전북 전주을 당내 경선을 앞두고 ‘거짓 응답을 권유하라’는 선거컨설팅 업체의 조언 등을 따랐다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고, 2022년 3월 징역형이 확정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한 여론조사 업체 대표는 지방의회 선거 출마를 준비하던 B씨와 공모해 1인 호감도 조사를 했다가 지난 1월 전북도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서 사전 선거운동 혐의로 고발되기도 했다. 여론조사업체 대표 C씨는 “정치브로커가 접근해서 조작된 여론조사를 하면 ‘당선 뒤 20억을 주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며 “여론조사 업체에 대한 제제는 과태료 1억원 정도라 누군가는 혹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③브로커의 노림수

정치브로커의 1차 목표는 금품이지만, 당선 후 이권이나 자리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수백명 이상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기초단체장 선거가 인사권과 이권을 노리는 정치브로커의 주요 무대로 꼽힌다. 승진과 이권을 대가로 금품 수수한 뒤 정치인에게 청탁해 성사만 되면 지역 정치권의 막후 실세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대가보단 정치적 성취감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민주당 중진 의원은 “‘내 전화 한 통이면 5선 의원도 꼼짝 못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며 “명씨 논란이 가시지 않는 것도 그가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 및 그 부인과 수시로 국정을 얘기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 아니겠냐”고 했다.

지구당 부활하면 돈 쏠릴 텐데…정치 브로커 우려도

정치 브로커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여야 대표가 추진하는 지구당 부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과거 ‘돈 먹는 하마’로 불렸던 지구당이 부활하면 금전적 이익을 노리는 정치 브로커의 먹잇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지난 9월 1일 대표 회담에서 지구당 제도 부활에 합의했다. 지구당은 국회의원 선거구 단위로 설치된 정당의 하부 조직을 뜻한다. 지구당은 1962년 12월 지역 주민의 의견을 수렴해 중앙 정치에 반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당법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명분과 달리 지역 정치인의 선거용 조직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특히, 2002년 16대 대선에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이 수백억 원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차떼기’ 사건으로 여론이 악화하면서 2004년 폐지됐다.

여야 대표가 지구당을 되살리려는 것은 정당 활동 위축과 관련 있다. 지구당을 대신해 2005년부터 설치된 당원협의회(지역위원회)는 임의 조직이어서 사무실을 둘 수 없고, 자체 활동도 어렵기 때문이다.

22대 국회에서는 지구당 부활법이 여럿 발의됐다. 지구당 명칭을 ‘지역당’으로 바꿔 연간 후원금을 50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는 법안(민주당 김영배 대표발의)과 역시 ‘지역당’ 명칭을 쓰되, 연간 후원금을 1억5000만원까지 거둘 수 있게 하는 법안(국민의힘 윤상현 대표발의) 등이다. 두 법안 모두 중앙당(분기별)과 지역 선관위(연간)에 회계 보고하는 내용도 담겼다.

하지만 돈이 모이면 불법과 탈법적 양태도 꼬이게 마련이다. 한 민주당 원외 인사는 “힘 있는 지구당 위원장에게 후원금이 몰릴 텐데, 뒷돈이 오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며 “돈이 모이는 지구당일수록 정치 브로커가 기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원외 인사는 “지구당이 민원·로비의 창구로 변질하면 정치 브로커가 횡행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 8월 보고서에서 “최근 전·현직 의원들의 불법 정치 자금 수수가 밝혀졌고, 쪼개기 후원 문제도 나타나고 있다”며 “지구당 부활은 이런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04년 폐지 당시에도 헌법재판소는 “지구당은 선거 브로커의 활동창구 역할을 할 위험에 노출돼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인 자금유통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2004헌마456)며 민주노동당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는 말이 있듯이 지구당 부활을 무조건 배격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회계보고를 더 꼼꼼히 하고, 처벌규정도 강화하는 등 정치 브로커가 개입할 수 없도록 보완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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