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호 법정

2024-11-04

고운진, 동화작가

“피고인들에 대한 각 공소사실은 각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해서 판결 선고합니다. 주문. 피고인들은 각 무죄.”

제주지방법원 4·3사건 전담 재판부 방선옥 부장판사 주문 낭독이 끝나자 법정 안은 박수 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흐느끼는 유족도 있어 이내 법정은 숙연해지고, 합동수행단 관계자들이 이들을 위로하며 법정을 벗어나고 있었다.

지난 9월 초입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름이 막바지에 이른 8월 말이었으리라. 4·3 사건희생자 직권재심 공판기일을 알리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직권재심 법정에 다녀왔다.

어릴 적 큰외삼촌 얘기는 외할머니에게서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형제자매 중 가장 영리하고 뛰어난 인물이어서였을까? 큰외삼촌은 그렇게 4·3 광풍에 휘말리면서 억울한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희생자들에 대한 변호사의 변론이 끝났다. 무고하게 징역형을 받고 심지어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는데, 가족들조차 몰랐다. 희생자들이 피신하면 피신했다고 끌려가고, 소개령에 따라 다른 마을로 이주하면 이주해 온 자라고 끌려갔다니…. 이렇게 억울한 희생이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확정된 판결에 대해 중대한 오류가 있는 경우 그 판결의 ‘당부(當否)’를 다시 심리하는 비상 수단적인 구제 방법이 바로 ‘직권재심 재판’이다.

이날 일반·군사재판 수형인 희생자 92명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직권재심이 이뤄지는 동안 방선옥 부장판사가 유족들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며 할 말이 있다면 해보라고 시간을 준다. 억울하게 살아온 통한의 세월을 유족들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음이리라.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모친도 개가하며 부모님의 사랑을 한 번도 못 받고 자랐다는 어느 유족의 절규에 이어 법정엔 긴 세월 동안 묻어뒀던 유족들이 흘리는 통한의 눈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희생자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유족들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나에게도 발언의 기회가 주어졌다. 난 희생자의 외조카 자격으로 법정에 참석했으나 큰외삼촌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어릴 적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라고 얘기했다. 그리곤 억울하게 희생된 수형인들과 유족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는 이는 오직 재판장뿐이라며 법정에 호소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일반·군사재판 직권재심 수형인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원혼(冤魂)이 되고 난 후 70여 년도 더 지나 받은 무죄 선고이지만 아직도 사바세계의 원한을 다 내려놓지 못한 채 구천을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안타까울 뿐이다.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꾸려진 지 3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직권재심을 기다리는 수많은 영혼들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들이 하루빨리 직권재심을 통해서나마 원한을 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곧 입동(立冬)이다.

찬바람이 스며드는 세월의 흐름을 어찌 멈춰 세울 수 있으랴만 70년 넘게 무심한 세월을 움켜잡으며 통곡하고 있을 우리 4·3 희생자들이 부디 하루빨리 영면에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