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행정명령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한다. 그러나 대규모 홍수, 전염병, 전시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행정부는 입법부나 사법부와 상의 없이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비상사태 여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하는 것일까. 해당된다고 주장하는 측과 그렇지 않다는 측이 나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법률 등 모든 규칙은 누가 만들고 또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때에 따라서는 곤란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신간 ‘알고리즘, 패러다임, 법’(원제 Rules: A Short History of What We Live By)은 우리가 어떻게 규칙(rule)을 만들고 또 규칙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지 역사적 사례에 비춰서 궁구한 책이다. 저자인 로레인 대스턴은 미국의 과학사학자로, 막스프랑크 과학사 연구소의 명예소장이자 시카고대 사회사상위원회의 객원교수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정의한 토마스 쿤 이후 과학사학계를 이끌어온 대표적 인물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한시도 규칙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교통 표지판부터 요리 레시피, 맞춤법, 스포츠경기, 헌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규칙이라는 그물망에 얽혀 있다. 더 나아가 재난이나 전쟁, 테러 등으로 상황이 급변하며 혼란스러운 비상사태에는 규칙을 찾기 위해 더 분투한다. 규칙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고 쓸데없는 촘촘함에 불만인 사람도 있지만 규칙 없는 사회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어떠한 규칙을 만들고 우리가 합의하느냐다. 이는 최근 국내의 ‘12·3 계엄’ 사태와 이어진 탄핵 정국에서 한국인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일반적인 규칙론이 지금에는 심각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저자는 “우리는 규칙을 찾아내 정리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이런 규칙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결정하면서 세계의 질서를 형성한다”고 지적했다.
책에서 저자는 규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치밀하게 분석한다. 과학사학자답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쿤, 로크와 칸트, 뉴턴과 비트겐슈타인, 홉스 등 역사적 인물들의 주장들을 제시하면서 규칙의 힘을 밝힌다. 그는 규칙을 △ 측정 및 계산의 도구로서의 규칙(알고리즘) △ 따라야 할 롤 모델로서의 규칙(패러다임) △ 사회 통제를 규칙과 연결한 법률(법)로 나눈다. “규칙의 역사란 이들 알고리즘, 패러다임, 법이라는 세 가지 범주가 확산되고 연결되는 과정”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이와 더불어 세 가지 대립쌍을 제시하기도 한다. 우선 규칙은 재량권이나 주관성을 대폭 허용하는 식으로 두껍게 만들어지거나 혹은 그 반대로 얇게 만들어질 수 있다. 또 유연하거나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으며 그 범위에서 일반적이거나 구체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타인의 행동이나 언어를 그대로 따라하는 롤 모델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유연하게 따르는 두꺼운 규칙의 사례다. 반면 특정한 값을 입력하면 철저히 결괏값을 도출하는 알고리즘은 얇은 규칙의 사례다. 법은 사회의 통제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세부적인 규정과 일반적인 법률로 나뉜다. 규정은 구체적인 현실에 직접 적용되는 만큼 점점 더 많아지고 복잡해질 수박에 없다.
만약 전혀 예상하지 못한 비상 상황과 마주할 경우 우리는 그것의 정당성과 대처 방향을 판단할 수 있는 규칙을 찾는다. 기존 규칙에 맞지 않는다면 곧바로 수정하려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면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저자는 알고리즘에 특수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고리즘은 수학이나 컴퓨터과학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일련의 단계적 절차로 해석된다. 반면 저자는 규칙으로서의 알고리즘에 대해 “불확실로 가득한 현 세계에서 예측 가능성과 안정을 향한 열망 때문에 모든 상황에 대비해 엄밀하게 짜인 알고리즘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라고 지적한다. 2만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