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북친중좌빨’로 낙인부터 찍은 뒤 근거 수집 나서…목적 달성하기 위한 모든 수단은 ‘정당화’
“야당 대표가 당선되면 북한·중국에 나라 팔아먹기 때문에 윤 탄핵 반대” 미래의 불확실한 결과를 사실로 가정해 현실 역규정하기도
민주주의 원리·과학적 발상은 이와 정반대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상정하지 않아…출발점은 겸손함을 가르치는 평범성
SF 소설의 대가인 아이작 아시모프는 1940년대 이후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른바 ‘로봇 3원칙’을 제시했다. “제1원칙-로봇은 인간에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제2원칙-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가 그것이다. 최근 인공지능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인공지능에도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과 비슷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언뜻 보기엔 아주 그럴듯해 보이는 아시모프의 원칙을 허물어뜨릴 방법은 없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인간의 정의를 자의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만약 로봇 설계자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지시문을 한 줄 넣는다면 로봇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부류의 사람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 이 방법은 내가 독창적으로 머리를 잔뜩 굴려 알아낸 방법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는 비슷한 방법으로 다른 인간을 탄압해 왔다. 여성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인정받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꽤 최근까지도 특정 피부색의 사람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다. 나치는 유대인을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했다. 신분제가 확고한 사회에서는 같은 민족이라도 하층계급은 인간이 아니었다.
예전에 어느 종교단체에서 북한과의 전쟁을 부추기는 집회를 하길래 그 종교를 믿는 지인에게, 이웃과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평화의 종교에서 어떻게 파멸적인 전쟁을 부추기는 행위를 선동할 수 있는지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 지인의 답은 아주 간단했다. “북한은 인간이 아니거든요. 사탄의 무리예요.”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그 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최소 수백만명의 인명피해가 날 텐데 감당할 수 있겠냐고 재차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사탄과의 전쟁은 ‘성전’이라 그만큼 큰 희생을 감수할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종교적인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공격의 대상이 자신과 같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설정’하면 인간을 향한 종교적인 율법이나 세속의 법률을 피해 갈 여지가 생긴다. 극단적으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무슨 짓을 벌여도 상관이 없다. 사탄은 화해와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척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가”라는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을 줄여주는 효과도 생긴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악마, 또는 사탄의 존재는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 ‘빨갱이’가 대표적이다. 4·3 제주나 5·18 광주에서 국가권력이 양민을 학살할 때 호출한 개념이 ‘빨갱이’였다.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아묻따’ 척결의 대상이다. 공산주의가 뭔지도 잘 모르는 노인이나 어린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빨갱이’의 위력은 북한의 위협이 커질수록 힘을 더한다. 남북한의 군사적 경제적 격차가 천양지차로 벌어진 뒤로는 중국이 북한의 자리를 대체해 왔다. 요즘은 ‘종북좌빨’보다 ‘친중좌빨’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들린다.
문제는 ‘종북친중좌빨’이라는 사탄을 임의로 설정해서 성전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자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2024년에 비상계엄이라는 몰상식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배경에는 ‘종북친중좌빨=반국가세력’이라는 사탄을 척결하기 위해 성전이 필요하다는, 그것이 역사적 사명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윤 대통령의 지지자들, 심지어 여당의 어느 최고위원도 지금 내란 행위를 옹호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성전’으로 칭하고 있다.
이들의 행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종교화된 정치적인 극단주의를 보는 것 같다. 하나는 결과가 과정을 거꾸로 규정하는 전도된 추론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맹목성이다. 먼저, 누군가를 ‘종북친중좌빨’로 규정하는 과정이 임의적이다. 그저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단 ‘좌빨’로 낙인찍고 이후에 그 근거를 찾는 방식이다. 한 사례를 들자면, 이들의 편에서 집회 등을 주도했던 어느 극우 유튜브 채널 운영자조차 자기들 내부 갈등 속에서 ‘화교 출신’ 내지 ‘친중 인물’로 찍히기도 했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활동을 중단(다른 이유들과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관위 부정선거론’도 마찬가지이다. 이런저런 증거들 때문에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는 논리에 충실하다면 그 증거들이 다른 반증들로 무너졌을 때 부정선거라는 결론을 끝까지 고수하기 어렵다. 반면 부정선거라는 결론이 애초에 포기할 수 없는 결론으로 먼저 상정돼 있다면 이를 부정하는 여타의 모든 반증들은 그저 기각될 운명일 뿐이다. 그 대가로 대단히 무리한 방어 논리가 서로 맥락도 맞지 않은 채 수도 없이 양산된다. 예컨대, 선거 결과를 조작하기 위해 투개표 참관인을 매수했다든지, 투표지분류기를 해킹했다든지, 가짜 투표지를 대량으로 바꿔치기 했다는 억지 주장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 명의 참관인을 매수하는 것은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1만7000명에 이르는 개표참관인 중 다수를 매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수준의 문제이다. 이는 마치 동전을 하나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 가능성이 50%라고 해서 100개의 동전을 던졌을 때 그와 비슷한 확률로 모든 동전이 앞면을 향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다. 실제 그 확률은 (1/2)100 10-30 정도로 극히 낮다. 이 숫자의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우주의 역사를 생각해 보자. 과학자들이 추정하는 우리 우주의 나이는 대략 138억 년이다. 이를 초로 환산하면 차수만 따졌을 때 약 1017초 정도이다. 꽤 큰 숫자이지만 1030에 비하면 턱없이 작다. 그러니까, 우주가 탄생한 이후로 지금까지 매초 100개의 동전을 던지더라도 100개 모두가 앞면이 나오는 경우를 관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반대 성향의 참관인 1명이 매수될 가능성을 50%라 가정했을 때 그런 참관인 100명이 모두 매수될 가능성이 이 정도로 미미하다.
미래의 불확실한 결과를 미리 사실로 가정하고 현실을 역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야당 대표가 당선되면 북한이나 중국 공산당에 나라를 팔아먹을 것이기 때문에 윤 대통령을 탄핵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는 미래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전제로 현재의 중범죄를 눈감아 주자는 논리이다. 마치 전두환을 처벌하면 그다음 정권이 전두환보다 더 많은 국민을 학살할지도 모르므로 전두환의 죄를 묻지 말자는 주장과도 같다. 이번 주말에 로또 1등에 당첨될 것을 전제로 오늘 명품점에서 싹쓸이 쇼핑하고 강남 아파트를 계약하는 사람은 없다. 그 확률이 0이 아니고 실제 누군가는 1등에 당첨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민주공화국을 전체주의로 되돌리려 했던 현실의 내란 사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미래에 더 크게 나라를 망칠 가능성만 커진다.
이처럼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좌빨’이나 부정선거)를 미리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 거꾸로 과정을 꿰맞춘 뒤에는 이 허상의 결과를 해소하는 과업을 ‘성전’으로 추앙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 그런 까닭에 윤 대통령이 전 세계에 내란 사태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음에도 아직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법원이 발부한 영장도 불법으로 몰아세운 게 아닐까 싶다.
심지어 그 지지자들은 구속영장 발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법원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자신들은 지금 ‘성전’을 벌이고 있으므로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심지어 실정법을 어기고 한국의 사법체계를 무너뜨려도 괜찮다는 식이다. 이는 목적이 수단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원리와 크게 어긋난다. 오히려 알카에다나 IS, 또는 탈레반 같은 극단주의 테러 단체에 훨씬 더 가깝다. 1·19 법원 폭동 사건은 말하자면 종교화된 정치적 극단주의가 ‘한국형 탈레반’으로 진화한 사례라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은 공수처에 체포되기 전 미리 촬영한 영상에서 자신과 지지자를 제외한 모든 사회시스템을 불법의 불법의 불법으로 규정했다. 자기만 옳고 나머지는 모두 다 틀렸다는 유아독존적 발상 또한 종교화된 극단주의의 한 형태이다. 선민사상이 유독 강력한 검사집단에 오래 몸담았던 윤 대통령의 경력도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리와 과학적 발상은 그와 정반대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상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평범성이 그 출발점이다. 그래서 공존과 토론, 결론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과학은 인간에게 겸손함을 가르친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The One)에서 변방으로 쫓아내며 지구도 수많은 다른 천제들 중 하나(one of them)에 불과함을 설파했다.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 종이 이 행성에서 딱히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 우주에는 우리의 은하수 은하 말고도 다른 은하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최근의 과학자들은 우리의 우주 자체가 수많은 우주를 품고 있는 다중우주 속의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은 인간이 그저 여럿 중 하나라는 평범성의 원리를 끊임없이 증명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우주적인 규모에서 살펴보자면 우리는 수천억 내지 수조개가 넘는 은하들 중 하나 속의 수천억개의 별들 중의 평범한 별에 묶인 돌덩이 위에 살고 있을 뿐이다. 21세기의 필수교양으로서 과학을 꼭 배워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 광활한 (다중)우주 속 여럿 중 하나의 평범함이 인류에게 가르치는 겸손함을 꼽고 싶다.
평소 윤 대통령은 극우 유튜브를 즐겨 봤다고 전해진다. 옥중에서 허락될지는 모르겠으나 이제부터는 과학 유튜브도 즐겨 보면서 과학이 가르치는 평범성의 원리와 겸손의 미덕을 꼭 배웠으면 좋겠다. 원한다면 부족하나마 내가 현대물리학에 대한 무료특강이라도 할 용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