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집권해서는 안 될 세력이 누구의 지지도 받지 않고 정권을 잡았다.” 작년 12월3일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이고 어쩌면 인류에 반복되어온 역사다. 그런데 이 문장이 적힌 소설에는 조금 더 맹랑한 구석이 있다. 절대로 집권해서는 안 될 세력이 정부가 되자마자 ‘주의자 소탕령’을 내린 것이다. 그것인즉슨 이 세상 모든 종류의 ‘주의’를 금지한다는 돌발 명령이다. 정부는 이상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 현실주의 등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지닌 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지만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하나둘씩 ‘주의’를 포기한다. 김홍의 단편소설 ‘조금자 여사 아주 깊이 잠들다’(‘자음과모음’ 2024년 겨울호)의 이야기다.
그런데 모든 ‘주의’가 사라지면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인류의 온갖 억압과 증오, 폭력과 전쟁이 그 ‘주의’ 때문에 생기지 않았나? 그러나 골똘히 고민해보면, 아니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거대한 사상도 사소한 일상과 촘촘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아주 작은 싹부터 일찌감치 잘라놓으려는 정부는 시민들의 온갖 행위를 통제하지 않을 수 없다. 무지한 것은 용감해지기 쉽고, 어설프기 때문에 더 무서운 법이다. 그렇게 나라는 쑥대밭이 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작가주의, 고양이를 귀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양이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이름까지 붙이면서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집중력이 떨어지고 끈기가 부족했던 주인공 ‘나’조차 주의력결핍장애 때문에 ‘주의자’가 될 수 없을까봐 걱정하지만, 세계가 허구라고 믿는 나름의 가상주의를 가지고 있다.
정리하자면 이 무지하고 어설픈 정부가 소탕하려고 한 ‘주의’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신봉하거나 지지한다는 의미의 ‘주의(主義)’. 어쩌면 정부가 가장 무서워하는 자율적인 사유와 실천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무언가에 집중하고 마음을 기울인다는 의미의 ‘주의(注意)’. 대단히 거창한 이론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저마다의 지향을 가지고 있다. 소설 속의 ‘나’처럼 소박한 사람도 세계를 그저 가상의 코미디로 이해했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진짜를 믿고 싶어 했다가 이별 후 그를 기리는 영화 제작에 동참한다. 그 힘은 결코 작지 않다. 권력자가 두려워하면서 한밤중에 난데없이 금지하고 수시로 검거해서 버릴 만큼. 이 두 가지 ‘주의’, 정치와 일상, 이념과 취미, 권력과 사랑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그 사실이야말로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다.
놀랍게도 지금 현실과 꼭 닮은 이 소설은 우리가 내란의 밤을 겪기 며칠 전 발표되었다. 어느덧 두 달이 지난 그간의 시간을 떠올려본다. 내가 12월3일 이후 광장에서 목격해온 건, 저마다의 깃발과 응원봉을 흔드는, 윤석열 체포뿐 아니라 모든 억압된 이들의 자유를 원하는, 여성과 장애인과 트랜스젠더의 권리와 해방을 요구하는,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고 다양한 욕망과 정체성을 지지하는,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했지만 다른 누군가는 더 필사적으로 외치려 했던 온갖 ‘주의’들의 파티였다. 김홍의 소설이 알려주었듯 정부가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모든 사람은 이미 ‘주의자’다. 심지어 ‘주의’를 포기하는 것마저 하나의 ‘주의’이므로. 그것은 편향된 시각을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와 조건을 이해하고 서로의 호오와 취향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일상도 폭력으로 억누를 수 없다는 뜻이며, 우리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원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