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대변인의 프랑스 조롱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3-18

프랑스에 가거든 ‘스당’(Sedan)이란 지명을 언급해선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 북동부 아르덴주(州)의 소도시 스당은 파리에서 200㎞쯤 떨어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인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에 전쟁이 터졌다. 당시는 독일이 통일 국가가 되기 전이었다. 프로이센은 오늘날의 독일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에 자리한 여러 나라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승리를 자신했던 프랑스군이 고전한다는 소식에 직접 증원군을 이끌고 출정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그만 프로이센군에 포위를 당했다. 1870년 9월1일 나폴레옹 3세는 결국 프로이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항복했고 곧바로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가히 ‘스당의 굴욕’이라고 부를 만한 참담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파리 시민들은 격분했다.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을 대체할 ‘국민방위정부’라는 이름의 공화정이 출범한 가운데 프로이센을 상대로 결사 항전을 다짐했다. 하지만 이미 궤멸 수준의 손실을 입은 프랑스군의 재건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전쟁 발발 이듬해인 1871년 1월 국민방위정부는 끝내 굴복했고 파리는 프로이센군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해 1월18일 프랑스를 상징하는 베르사유궁에서 독일 제국 선포식이 열렸다. 그간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던 독일이 하나가 됨과 동시에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통일 독일의 황제로 추대된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독일은 잔인했다. 독일과의 접경지에 있는 프랑스 영토 중 알자스와 로렌 두 주를 뺴앗아 독일에 합병한 것이다. “그것만은 안 된다”는 프랑스의 간절한 요구는 거부됐다.

일제강점기를 겪거나 배워 아는 한국인에게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은 남 얘기 같지 않다. “이제부터 알자스와 로렌 주의 학교에서는 독일어만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왔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프랑스 말 수업이니 아무쪼록 열심히 들어주세요.” 소설 속 프랑스어 교사의 말이다. 1871년 독일과의 전쟁에 져 눈물을 머금고 알자스·로렌 두 주를 독일에 넘긴 프랑스의 비애가 녹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결과 승전국인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되찾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초반 나치 독일의 전격전에 무너지며 알자스·로렌을 비롯한 프랑스 국토의 3분의 2 이상이 4년가량 독일군의 점령 통치를 받았다. 올해가 종전 80주년이나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트라우마는 여전하다.

미국 백악관의 캐롤라인 레빗 대변인이 17일(현지시간) 브리핑 도중 “프랑스인들이 지금 독일어를 쓰고 있지 않은 것은 미국 덕분”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출신의 라파엘 글뤽 유럽의회 의원이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비판하며 “자유의 여신상을 반환하라”고 요구한 것에 대한 반응이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초대형 조형물이다. 레빗은 2차대전 초반 독일군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허망하게 굴복한 프랑스가 미국의 도움에 힘입어 국권을 되찾은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레빗도 반드시 알아야 할 교훈이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이 독립을 위해 영국과 다투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지원이 없었다면 독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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