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후익의 동생 손학익(孫鶴翼, 손무석 孫武釋, 1908~1983, 범서 입암 214)은 1927년 가을 유명술과 함께 방어진에서 생선 장수를 가장하고 활동하던 중 언양의 독립운동가 신주극(申周極)의 지령을 받아 항일격문을 살포하려다 일경에 붙잡혀 구금당했다. 1928년에는 대구에서 대협(大協)이라는 단체에 가담·활동하던 중 다시 일경에 붙잡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에는 박재기·변기학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 상황을 살핀 후 흥사단(興士團) 계열의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붙잡혀 6개월간 구금당했다.
1932년 서울로 돌아와 김중만 등 3명의 동지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경남 양산 일대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구금당했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 양산지국 기자도 겸직했다.
광복을 앞두고 그는 여운형과 김창숙의 지시를 받고 건국동맹(建國同盟)의 지하조직 결성에 힘쓰는 한편 항일 학생운동에도 관여하다가 붙잡혀 1945년 2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1935년 손학익의 수형자 카드가 현존한다. 본명은 손무석(孫武釋)이고 다른 이름이 손학익(孫鶴翼)이다. 명치 41년(1908) 6월 14일생으로 출생지는 경북 경주군 강동면 오금리(慶州郡 江東 五琴)이다. 본적 및 거주지는 범서면 입암리 264번지로 되어있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죄명은 “변기학(卞奇學)이 적색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협의한 것”으로 되어있다.
변기학(1909~1974, 경남 창녕)은 경기도 적색노동조합 사건으로 1935년 10월 구속되었다. 변기학은 1934년 6월경부터 1935년 8월경까지 1년여 동안 여러 차례 정재철을 비롯해 손술석·김만기·김복금 등과 회합하며, 각 공장 내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반제·반전투쟁을 전개하는 문제에 대해 협의하였다. 1937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 150일 통산)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경찰은 조선공산당의 거두 이재유를 변기학의 배후 인물로 추정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손학익은 이재유와 동지적 관계에 있었던 범서 입암 출신 이관술의 영향을 받아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손학익은 경주 여행 중에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체포돼 1945년 2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 해방을 맞았다. 1948년 그는 경주 강동면 면장을 했다.
그 후의 일

이우락은 제2차 유림단 사건 이후 울산 입압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시문을 적으며 생활하고 입암서당을 운영했다. 이우락의 모친이 1939년 2월에, 형인 이운락은 5월에 사망하였다. 이우락은 유림단 사건 이후 입암서당을 10여 년 동안 운영했으나. 일제의 해제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칠순에 가까운 때이니 아마 1945년 전후인 듯하다. 그는 “궁핍한 거처에서 무료하여 날마다 마을의 수재들과 함께 즐거워한 지가 십여 년인데 금년 정월에 홀연히 해체하라는 금령이 있어서 즉시 흩어서 보냈는데 뜻밖에 협서율(挾書律)이 지금에 다시 일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일제의 서당 해체령을 진시황이 민간인의 책 소유를 금지한 협서율과 같은 문화 탄압으로 인식했다.
이우락은 5형제가 있었다. 이중 형 난파(蘭坡) 운락(雲洛)과 동생 문음(文陰) 희락(曦洛)이 학문이 높았다. 운락과 희락은 1932년(임신년) 울산지역 문사 20명이 모임을 결성해 매년 봄, 가을에 만나 한시를 짓고 현실을 토로하며 우의를 다졌던 ‘보인계(輔仁契)’에 참여하였다. 보인계는 45년 동안 유지되다 1970년대에 이르러 사망과 이주 등으로 계원 숫자가 줄어들었다. 결국 1976년 여름 청계 류흥호의 집에서 가진 계회를 끝으로 해체됐다.
이우락은 광복을 맞았을 때 쓴 ‘족숙 건부에게 답하다(答族叔健夫)’에서 다음과 같은 기쁨을 표현하며 새 나라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는 글을 남겼다.
“금계(金鷄)가 한 번 울면 긴 밤이 문득 밝아지듯이 무궁화 강산의 동포 중에 누구인들 무덤에서 다시 일어난 것 같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는 옛 뜻을 굳게 지키며 60년 동안 답답하게 있음과 같음에서겠습니까? 몇 년 전부터 비록 저 원수가 오래지 않아 박멸할 줄을 알았지만 이처럼 급속하게 끝나리라고는 뜻하지 못했습니다. 또 국토 안에서 한 점의 비리고 더러운 것이 없이 유쾌하게 맑은 하늘과 편안한 땅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행복합니다. 기쁨이 지극하여 뜀뛰고 손뼉을 치면서 동지들과 함께 가슴을 헤치고 서로 경하하고 싶은데 마침 먼저 편지를 보내주셨으니 이때의 느낌과 행복은 평소의 백배나 됩니다.”
이 당시 이우락은 심산 김창숙과도 연락하고 있었다. 이우락은 을유년(1945) 나라의 광복 뒤에 지은 ‘태평가’에서 “한 사람의 얼굴을 속박하니, 온갖 나라가 모두 평안하네. 용이 날고 봉황이 날아오르니, 바람과 구름이 아름답네.”라고 하였다. 거주지 옆에 작은 집을 지어서 배우러 온 자들을 거처하게 하고 과조(科條)를 엄하게 하면서 진작하여 질서정연하게 하니, 사람들 중에 감화하여 입신한 자가 많았다.
이우락은 경인년(1950) 가을에 우연히 다리가 병증(病症)으로 부풀어 오르더니 신묘년(1951) 봄에 조금 나았다가 문득 심해지더니 여름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일어나고 눕는 것을 사람을 시킬 지경이었다. 이우락은 6월 22일에 향년이 71세로 사망하였다. 부인 고령 김씨(1886~1934)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이우락의 막내 동생 희락은 형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공은 본디 가학(家學)의 연원이 있고 밖으로 사우(士友)를 만나서 자기의 격식을 넓혔다. 분화(芬華)를 끊고 근본과 실질에 뜻을 집중함으로써 떳떳한 도리를 선무로 삼고 극기·궁리를 공부의 절도로 삼았다. 입신(立身)과 제행(制行)이 평이하고 명백하여 수양이 깊고 쌓음이 두터워서, 바라보면 쇄락한 기상이 있고 다가가면 온윤한 기색이 있었다. 대범하게 정해진 힘이 있어서 비록 창졸간에 일을 만나더라도 황급하거나 허둥거리지 않았다. 늘 검약을 지켜서 입고 먹는 데 해진 솜옷과 나쁜 채소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기의 지조(志操)를 지켜서 어두운 방에서도 속이지 않고, 신의(信義)는 고을과 나라에서 미쁨을 받고, 교령(数令)은 어리석은 선비들에게 미쳤으니, 이것이 한 시대에 추앙을 받는 까닭이었다.”
이우락의 4권 4책 <가산문집(可山文集)>은 1967년 제자 이용수에 의해 편집 발간되었다. 권1은 시, 권2는 서·설·명, 권3은 서·후서·기·지·상량문·애사·통문·축문·고유문·제문, 권4는 제문·묘갈명·행장·유사·부록으로 돼 있다. 2022년 후손들에 의해 한문을 우리말로 옮긴 국역 문집 <가산문집> 3권을 발간했다.
손후익은 입암에서 다시 경주로 거주지를 옮겼다. 1931년에는 도산서원 부원장에 천거되기도 했으며, 이진상(李震相)과 장지연(張志淵) 등의 문집간행에 참여했다. 1940년 김창숙이 창씨개명을 거부할 때 영남에서 상투를 보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창씨를 하였다. 손후익은 일제가 머리칼을 자르자 잘린 상투를 그대로 얹어 다녔다.
손후익은 1945년 해방이 되고 백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원들이 환국하자 서울로 가서 백범에게 국내 사정을 알려 주었다. 당시 임정 요원들은 함께 참정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손후익은 사양하고 돌아왔다. 김구 중심의 상해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열었고,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중앙위원 76명 중에 손후익의 이름을 올렸다. 1946년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 등의 유해가 부산을 통해 들어왔을 때 손후익은 추도 행사에서 추도사를 지었다.
손후익은 해방 무렵 대구 아들 집에 가 살다가 1953년 타계했다. 김창숙는 그의 영전에 글을 올려 “자네가 전날 병이 없을 때에 높이 표방(標榜)하여 우리 무리가 의지하였는데 자네가 지금 일어나지 못하매 후생이 궤범을 잃었으니 누가 지도할 것인가?” 한탄하였다. 김창숙과 손후익은 오랫동안 사귀어 담감하기가 물 같은 사이였다. 의리의 척도가 맞기도 하지만 어긋날 때도 있어 서로 얼굴빛 붉히며 다투기도 했지만 절충(折衷)하여 소융(昭融)에 이르렀다. 김창숙이 중국으로 도망갔을 때, 손후익은 눈물을 흘려가며 안팎으로 연통하여 김창숙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회고했다. 언양에서 교통사고로 다쳤을 때, 김창숙은 “자취를 숨기고 자네의 집에 들어갔으니 달이 몇 번 바뀌었든고. 병으로 신음하며 엎드려 있는데 눕고 입고 소변보는 것까지도 그대가 붙들고 끌어 주었다.”라고 하였다. “그대의 일생을 산고하여 보면 웅심한 문장의 성한 이름으로 빌려서 울렸다. 효제(孝弟)의 근신함과 충신(忠信)의 면강함으로 자처하기를 무능한 것 같이 하였다. 말하고 침묵함에 이르러서는 수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예전 빛을 보전하였다.”라고 하였다.
1937년 울산농업실수학교가 갑종농교로 승격되었을 때 학교 건설비 17만1000원이 필요했다. 울산군읍면민 기부금 6만8000원을 모금할 때 김좌성은 1만5000원, 오의상 6000원, 이재락은 1000원을 기부하였다.
입암마을에 독립운동 기림공원이 조성되어야 한다
범서 입암마을에는 유림의 독립운동 이후, 이관술과 그의 여동생 이순금의 사회주의적 독립운동이 있었다. 이념적 갈등으로 인해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지만, 언젠가 이념적 경계가 허물어지면 그들도 독립유공자로 호명될 것이 분명하다.
해방 후 신탁통치 문제로 나라의 갈등이 심할 때, 김창숙은 입암마을 출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만난 적이 있다. 김창숙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관술과 이승엽이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김창숙을 방문한 뒤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이관술과 이승엽에게 김창숙은 “탁치를 환영한다는 것은 나라를 파는 매국”이라고 질타했다. 이에 이관술은 “정세를 보면 탁치는 불가피하며, 정세를 알지 못하고 공연히 반대만 외치는 것은 국가에 해로운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창숙은 공산당 “최고 간부 몇 사람이 소련군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태도를 돌변해서 찬탁하게 된 것이니 통곡할 노릇이다”라며 맹렬히 비판했다. 이에 이관술은 “미국이 바로 이리지요. 저 이리를 견제하려면 소련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결국 이때의 만남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난 마지막 인연이 됐다.
해방 이후 나라의 건설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는 독립운동가들마다 달랐다. 민족해방을 추구하는 독립운동에는 한 뜻이었다. 하지만 사상에 따른 독립운동 방식은 달랐고, 그것은 새 나라 건설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좌우합작을 제대로 했다면 통일국가가 건설되었을 것이다.
손후익 일가는 4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아버지 손진수(孫晉洙, 손진인 孫晋仁, 1869~1935)는 건국포장을, 숙부 손진형은 애국장을, 손후익과 손학익 형제는 애족장을 수훈했다. 사돈인 심산 김창숙은 대한민국장, 그 아들 김환기와 김찬기는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손후익의 처남 정수기는 애국장, 독립군자금에 쾌척했던 김창숙의 사돈 이재락은 애족장을 수훈했다. 가산 이우락은 건국포장을 받았다.
입암마을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난 뒤에도 입암마을의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공원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현실화하는 일이다.
이병길 작가, 지역사 연구가, 항일독립운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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