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고받는 법을 모른다 : 민폐와 오지랖이 ‘서툰’ 사회

우리는 주고받는 법을 모른다 : 민폐와 오지랖이 ‘서툰’ 사회

The Lost Art of Give and Take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61), 2025.7.16,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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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민폐, 선물, 겸사겸사, 유리병편지, 신뢰

1.머리말

2.우리는 ‘제대로’ 주고받는 법을 모른다 :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

3.겸사겸사와 즐거움의 마법 :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4.부서진 울타리와 해방 : 믿을 만한 사람만 믿으면 될까?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연구자님은 주변에 폐를 잘 끼치시는 편인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무언가가 필요할 때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을 잘 구하시는 편인가요? 혹은 ‘무엇인가’ 필요하지 않더라도, 그냥 굳이 남에게 귀찮게 굴거나 떼를 쓰거나요.

저는 웬만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 있어도 남에게 “도와줘”라고 잘 말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소심한 것도 이유지만, 내심 저는 이런 저의 성향을 ‘다른 사람의 사정을 사려깊게 생각한다’ ‘자립적 성향’이라고 뿌듯해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서로간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회입니다. 이 때문에 서로 선을 넘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예의'처럼 여겨지곤 하죠. (왼쪽) 과거 서울시는 "오지랖이 세상을 구한다"며 어려운 이웃들을 살펴보자는 캠페인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링크) 통상 오지랖은 나쁜 의미로 쓰이곤 하지만, 오늘날 타인의 일에 굳이 관심을 갖는 사람은 잘 없죠. / Unsplash, 서울시

그런데 정말 이처럼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결심은 훌륭하고 독립적인 걸까요?

저는 저의 ‘본심’에 대해 곰곰 생각하다가,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ㄱ.‘복잡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

ㄴ.폐를 주고 받는(?) 법을 모른다

ㄱ. 우선 솔직히 말하면, 이런 생각은 ‘남을 생각해서’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제가 폐를 당하거나 혹은 귀찮은 일에 얽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혹시 상대방이 거절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도 무시 못하고요.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 보여도, 웬만해선 나서서 ‘오지랖’을 부리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ㄴ. 또한, 한 발 더 들어가 생각해보자면 -

어쩌면 제가 폐를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다기보다는, 폐를 끼치려고 해도 누구에게 어떻게 끼쳐야하는지 방법 자체를 모르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마치 수영을 안해본 사람이 발장구 치는 법을 모르듯요.

실은 우리는 통상 인터넷 기사에서 ‘경악스러운 민폐’만 보기 때문에 폐를 끼치는 건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심지어 “도와줘”라는 말도 민폐 취급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필요할 때에 제대로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을 땐 괜찮겠지만 설령 하나라도 무너지기 시작하면 - 그때도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때도 폐를 끼치느니 그냥 혼자 무너지는 편이 나은 걸까요?

그리고 우리는 ‘오지랖’ 또한 성가신 것으로 여기곤 하는데, 이 오지랖 역시 그 자체가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오지랖을 ‘제대로’ 부리는 법을 모르는 게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오지랖이란 먼저 나서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기도 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

최근 여기저기서 “민폐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모두 서로 민폐를 끼치고 살자”란 주장들이 나오고 있지만, 실은 이처럼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우리는 인간이므로 서로 민폐를 끼치고 오지랖을 부려야 한다’라고 거룩한 이야기를 해봤자 별 소용이 없겠죠.

이 때문에 이번 기회에, 저는 폐끼치기와 오지랖에 대한 -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일에 대한 ‘방법’ 차원에 주목해 해찰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폐끼치기와 오지랖’이 돌아가는 공동체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요.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지카우치 유타),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오가와 사야카) 등을 지팡이 삼아보겠습니다.

【2.우리는 ‘제대로’ 주고받는 법을 모른다】

만약 누구나 선물을 주고받는 ‘산타 마을’이 있다고 상상해봅니다.

그런 마을에서 오래오래 평등하고 문제 없이, 모두에게 선물이 잘 돌아가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모든 사람이 천사처럼 착할 것? 자기봉사 정신이 투철한 사람일 것? 모두 ‘믿을 만한’ 사람일 것?...

그렇지 않습니다. 핵심은 누가 누구에게 주는지, 누가 더 비싸고 큰 선물을 주었는지, 누가 더 많이 주었는지, 저 사람이 내게 선물을 준 적이 있는지, 누가 내 선물에 충분히 감사를 표했는지 등.... -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별로 내 맘에 안드는 사람한테도요.

만약 이 핵심 조건이 없을 경우, 우리는 ‘왜 나는 비싼 선물 줬는데 너는 지우개 한 개 줘?’ ‘내가 이만큼 좋은 선물을 줬는데 왜 너는 별로 고마워 하지 않아?’... 라고 말하다가 결국 서로 손해보기 싫어서 선물을 주지 않기로 결심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지나치게 생색을 낸다면, 다른 사람들이 이에 부담감을 느끼면서 권력관계가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이런 일을 하는 게 ‘천사’ 아니냐고요?

일본 철학자 지카우치 유타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세상에서 수많은 선물들 속에 둘러싸여 살아가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건 자신이 받은 걸 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도 선물을 주는 사람 자신이 주는 행동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즉, 선물을 받는 사람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거죠.

*

위의 이야기는, 제가 지카우치 유타의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 속 메시지를 ‘산타 마을’에 대한 상상으로 정리해본 것입니다.

이 책의 일본어 원제는 <세상은 증여로 이루어져있다>인데요.

책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할 뿐 실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선물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선물을 받을 권리가 있고, 또 선물을 대가 없이 서로 나눌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우리가 누구나 선물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요.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쐬고 있는 에어컨도 제가 그걸 직접 발명해내거나 만든 것도(?) 아니지만 분에 넘치게 잘 쓰고 있고요.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책과 신문, 컴퓨터, 먹는 간식, 이 모든 것이, 생색내지 않은 누군가로부터의 선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만약 이 세상에 저 혼자만 있었다면 여전히 돌을 가지고 놀고 있었을 테니까요.

다만, 제가 이 책을 오늘 편지에서 함께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 그보다도 이 책에서 기존의 증여론들과는 색다르게 저자가 의외의 포인트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바로 선물을 주고 받는 ‘제대로 된 방법’에 대한 것이죠.

일본의 철학자 지카우치 유타 (왼쪽)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 한국어판 표지. 일본어 원제는 '세계는 증여로 이루어져있다世界は贈与でできている'입니다. / 지카우치 유타 X계정(링크), 다다서재

우선, 저자는 책에서 (선물의) ‘증여’를 “우리가 필요하다고 여김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및 그것의 이동”이라고 정의하는데요.

즉 저자가 말하는 “선물”은 꼭 우리가 상상하는 종류의 생일선물 같은 것에 국한된다기보다는, 도움이나 돌봄, 사랑, 오지랖, 헌신 등까지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통상 선물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주는 입장(손해)’이고 받는 사람은 ‘받는 입장(이득)’이므로 보답을 해서 손익을 맞춰야 한다 등의 생각을 하곤 하는데요.

저자는 단호히 고개를 젓습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주는 선물은 오히려 상대를 권력관계, 저주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세상에서는 선물의 흐름이 뚝 끊어지고 말죠.

*

잘못된 방식의 선물은, 상대방에게 응답, 즉각적인 반응, 보답, 효능감 등을 바라고 보낸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선물을 주는 순간, 즉시 보답과 효능감,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선물만을 주고 싶어 하곤 합니다.

문제는 이처럼 자신이 선물을 주었다고 즉시 내색하고, 뿌듯함을 느끼고 싶어하는 경우엔,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행동(감사, 감격 등)이나 답례를 하지 않을 경우 원망하고 분노하게 된다는 겁니다.1) 상대의 행동을 조종하려는 강력한 기대를 품게 되는 거죠.

심지어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요.(대표적으로는, 상대는 생각않고 자기 잘난척만 하려는 ‘잔소리’ 등) 준 사람이 응답을 바라는 순간, 권력관계가 만들어지고 받은 사람은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의 빚을 지게 됩니다.

* 오늘날 청년들은 ‘증여적 유효성 감각’이 강하게 느껴지는 증여에는 적극적이지만, 유효성을 느끼기 어려운 증여에는 점점 더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내 일거수 일투족이 이 세계를 구한다> […] 자신이 한 증여의 의미를 그 자리에서 손에 넣으려 하는 것이죠. 그것은 명백한 인지적 실패입니다 […] ’세카이계* 증여’를 추구하는 사람은 미력(微力·미약한 힘)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이 사회에서 미력이 전부 사라졌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지 못합니다.

*세카이계(世界系) =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서 자신 주변의 삶이 곧 세계의 중심,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인 것처럼 이끌어가는 이야기를 지칭하는 서브컬쳐 용어.

* 요컨대 증여는 그것이 증여라고 알려져서는 안된다 라는 말입니다. 이건 증여다. 너는 이걸 받아라, 라고 분명히 이야기될 때, 증여는 저주로 바뀌어 수취인의 자유를 빼앗습니다. 수취인에게 무언가 건네지는 순간 그것이 증여라고 뚜렷이 드러나면 그 즉시 답례의 의무가 생겨나버리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증여에서 교환으로 변모하고 말죠. 그리고 수취인에게 교환할 것이 없는 경우 수취인은 부채의식에 짓눌려 저주에 걸립니다.

-지카우치 유타,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이하 동일)

저는 이런 대목을 읽으며, 부모가 아이들을 키워준 대가로 어떤 행동을 바라고 삶의 목표를 강요하는 사례 혹은 “후원을 받는 아동들이 비싼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은 옳지 않다”(링크)고 말하는 사례 등이 떠올랐는데요. 혹은 내가 나중에 자리를 양보받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길 싫어하거나요.

저자는 많은 왜곡된 선물들이 선의이기는 커녕, 자신의 ‘희생’을 대가로 상대를 얽매는 권력관계, 혹은 선물의 종착점이 되기도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때문에 실은 선물을 주었다고 뿌듯해하고 내심 ‘보답’을 기대하기 이전에, 내가 준 것이 선물이 맞는지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는 거죠.

*

반면 저자는 가장 좋은 선물이란, 누가 보낸지도 모르게 슬쩍 놓아보내는 유리병 편지2)같은 것이라고 말하는데요.

받는 사람이 누가 보낸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채로 선물을 맘껏 누릴 수 있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작은 이름없는 선물들’이 모여서 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 사람이 길을 걷다가 제방에서 작은 '개미구멍'을 발견했다. 그는 별 생각없이 작은 돌멩이를 끼워서 구멍을 막았다. 그 개미구멍을 내버려두면 큰 비가 내렸을 때 거기부터 제방이 무너져서 마을이 탁류에 휩쓸릴터였다. 하지만 구멍이 막힌 덕분에 제방은 무너지지 않았고 마을에도 아무 일이 없었다.

이 경우 구멍을 막은 사람의 공적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당사자도 자신이 마을을 구했다는 사실을 모른다.(우치다 다쓰루)”

그 공적이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로자, 칭송받지 않는 영웅. 이름없는 영웅. 그런 영웅은, 즉 평가받을 일도 칭찬받을 일도 없이 남모르게 사회의 재앙을 없애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 이름 없는 영웅은 상상력이 있는 사람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되었던 어부 김정판씨의 이야기. 그는 공식적인 직책을 가진 것도, 누군가 그의 수고를 알아봐주고 돈을 준 것도 아니지만 그는 묵묵하게 환경보호, 해양쓰레기 저감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왼쪽) 오늘날엔 '제대로 된 선물'을 주는 사람도 드물지만, 한편 타인으로부터 선물을 받으려 하는 사람도 적습니다. 아주 작은 외부의 도움이라도 받느니 차라리 홀로 견디는 것을 택하겠다는 것이죠. / 오마이뉴스, Unsplash

그렇다면 ‘받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요?

실은 이 세상에 '받는 사람'이 아닌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생 주는 사람만 있을리도 없고요. 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는 그 수많은 이름없는 선물들에 비굴함 없이 감사하는 마음(특정한 사람보다도), 그리고 내가 필요할 땐 취약함을 내어놓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능력, 나중에 여력이 되면 나와 같은 사람을 돕는 마음 정도겠죠.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선물(도움)을 주는 것을 싫어할 뿐아니라, 받는 것조차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주 작은 한 발판이라도 사라지면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고독 속에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저자는 책에서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고 듣고 자라온 한 일본 중년 남성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병에 걸리고 자신은 실직하게 되자 “이제 죽는 수밖에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소개합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칠 수 없어”와 “이제 죽는 수밖에 없어”라는 두 문장 사이에 어째서 무언가 다른 방법이 들어갈 수 없었을까요?

[…] 문제는 “타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라는 전제 자체입니다. 애초에 우리에게 관계가 필요한 때는 바로 그 <교환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가 아닐까요? 우리가 곤궁하고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때는, 교환할 것이 없기 때문에 ‘도와줘’라고 말하는 것 아닐까요? [...]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도와줘라는 요청이 응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새삼스럽게 깜짝 놀랐습니다.

동어반복 같긴 하지만,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즉, 막상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건, 이 사회에서 아무런 도움도 오가지 못한다는 의미나 다름 없는 겁니다!

물론 이를 도움을 구하지 않은 사람만의 문제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회의 분배 및 복지체계 자체를 개혁해야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취약함을 조금이라도 드러내었을 때 ‘자업자득’ ‘루저’라고 손가락질하는 사회적 시선이 따갑고요.

다만, 저자는 묻습니다.

만약 그 남성이 큰 일을 당하기 전에 서로간에 자유롭게 크고작은 도움, 선물들이 흐르는 사회였다면 홀로 그 모든 좌절을 품에 안은 채 세상을 떠나야만 했을까? 우리가 그 사이에 [무언가의 영역]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실직, 사기, 가족이나 자신의 질병 등 아주 작은 불행 하나만으로도 순식간에 일상을 유지하는 발판이 무너질 수 있는 시대에 이는 단지 ‘나 아닌 누군가’ 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1) 저자는 이런 종류의 수취인이 원치 않는 선물을 '올해도 받아버린 청첩장'이라는 흥미로운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일단 별로 필요없는 것이라도 받아버렸기 때문에 답례의 의무, 속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최근 제가 읽은 일본 살인사건 관련 르포(딸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 <의대 9수를 시킨 엄마를 죽였습니다>(링크)에 따르면, 딸이 어렸을 때부터 강압적인 태도를 고수해온 어머니는 딸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면 곧장 정신적인 압박을 가해 무력하게 만들어왔는데요. 독특한 점은 이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원치도 않는 선물'을 자주 주려고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백만원대의 화려한 후리소데(고급 기모노)를 TV에서 보곤, 원치도 않는데 그걸 사안기고서 그걸 준 만큼 "왜 내가 그런것도 사줬는데 너는 공부를 제대로 안하냐!"는 식으로 언어폭력을 가하는 식입니다. 이경우는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가까운' 권력관계 사이에서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고로 저자는 너를 먹여주고 입혀준 만큼 너는 공부를 잘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역시 진정한 증여가 아닌 자유를 제한하는 저주에 가깝다고 강조하는데, 왜냐면 아이는 부모에게 증여할 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2)'유리병편지'라는 표현을 저자가 직접적으로 책에서 하진 않았지만, 저자가 반복적으로 책에서 설명하는 선물의 특징이 발신자는 분명하지만 수신자는 정해두지 않은 유리병편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이 표현을 써보았습니다.

【3.‘겸사겸사’와 즐거움의 마법】

이상 우리는 선물이라고 해서 무작정 주는 쪽이 착하고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선물로 인해 권력관계가 생기고, 사람들은 선물을 받기조차 꺼리는 현실이고요.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 선물을 아무런 기대 없이 줘버리고는 내색도 하지 않고, 권력 관계도 없이 누구나 편하게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공동체가 현실에 존재할 수는 있을까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닐까요?

놀랍게도 그런 선물들이 오가는 장소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바로 홍콩의 청킹맨션*에 위치한 탄자니아 이주민 공동체입니다.

*청킹맨션 = 홍콩 침사추이 지역에 1961년 세워진 주상복합 건물. 왕가위 감독 영화 <중경삼림>(1994)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은, 일본의 인류학자 오가와 사야카가 홍콩 청킹맨션의 탄자니아인 커뮤니티에서 함께 지내며 관찰한 내용을 담은 인류학 에세이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청킹맨션의 보스”인 카라마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탄자니아인들 사이에선 이런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 정도라고 하죠.

“곤란한 일이 생겼다면, 곧장 청킹맨션으로 가서 카라마를 찾아라!”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그런 걸까요?

그런데 이 “보스”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마피아 영화 속 멋진 ‘보스’와는 달리 딱히 권력도, 위엄도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카라마가 또 늦잠잤어!”라며 놀림을 당하고, 지나가는 홍콩 사람에게 장난을 걸고 싶어하고, 약속시간에 잔뜩 늦고, 어딜 가나 핸드폰을 들고 인스타라이브를 하는 데 여념이 없고 누군가 자신의 도움을 바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충’ 돌봐주는 오지랖 넓고 웃긴 ‘옆집 아저씨’죠. 그는 2000년대 초반 청킹맨션에 터를 잡은 뒤로 이곳에서 탄자니아 중고차 구매 고객-현지 상인을 중개하는 중개인(브로커) 역할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일본 문화인류학자 오가와 사야카는 청킹맨션에서의 조사 외에도, 과거 직접 스와힐리어를 배워 탄자니아 등에서 현지인 상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인류학 조사를 해왔습니다. 그가 홍콩에서 탄자니아인 공동체를 조사하던 시절 '청킹맨션의 보스' 카라마(왼쪽)와 함께 찍은 셀카 (왼쪽)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있다> 책 표지 / HONZ(링크), 갈라파고스

홍콩의 탄자니아인 커뮤니티는 꽤 특이하게도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도 오는 족족 밥을 먹여주고 1년이 넘게 재워주기도 하고(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거만한 풋내기 도련님이라 할지라도), 현지에서의 생존법, 비즈니스 방법을 고스란히 전수하고, 위험한 사업을 하다 실패한 이에게 “자업자득”이라는 말 없이 도와주고, 심지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곳에서 죽으면 대신 수천만원을 모금해 본국으로 이송해 장례를 치러주기도 한다는데요.

놀라운 것은, 이 공동체가 ‘고정적’이지도 않고 뜨내기들이 훨씬 많으며 정기적인 회비를 걷지도, 자격조건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도움을 준 사람에게서 보답을 받는다는 가망조차 없죠.

주로 난민이나 망명자, 불법체류자, 성노동자 등 적잖이 떳떳하지 못한 데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조합이 ‘왜 그를 도와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어려울 때는 피차 마찬가지’라는 호수적*인 논리로 생각하는 게 가능할까. 병 때문에 사망한 경우와 불법 노동의 결과로 안게 된 문제 사이의 차이 - ‘자기 책임’이란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 - 를 묻기가 매우 까다로운 사람들에게 호수성이란 무엇일까.

[…] 조합에 계속 공헌할 거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 어쩌다 만났을 뿐인 사람의 불행에 응답한다는 것을 이들은 어떠한 논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 조합원들의 조합 활동 공헌도에도 차이가 있다 [...] 호수성을 기반으로 조합이 운영된다고 했을 때, 조합 활동에 공헌하지 않는 사람도 지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호수성(repiprocity·互酬性) = 서로 주고받는다는 의미. 상호성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긍정적인 것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의 '호혜성'에 비해서는 중립적, 객관적인 뉘앙스가 존재.

-오가와 사야카,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이하 동일)

실제로 저 역시 저자와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는 내내 ‘아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해야 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카라마는 엄청나게 ‘착한’ 사람이라서, 탄자니아 사람들은 엄청나게 ‘이타적인’ 사람이어서 이런 게 가능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카라마는 기본적으로 사회운동가가 아닌 ‘브로커’로서 돈을 버는 사람이고, 공동체나 정의같은 거창한 이야기엔 관심도 없고 차라리 농담, 놀기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때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혹은 별 다른 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 핵심 원칙을 저는 다음의 두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았습니다.

1. #‘겸사겸사’ 정신 : 대충 도와주기

2. #부서진 울타리 : 울타리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부서지는 것이다

*

1.#겸사겸사 정신 : 일단 카라마를 비롯한 탄자니아인 공동체가 수많은 어려움뜨내기들을 도울 수 있는 핵심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게 별로 힘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통상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건 굉장히 어렵고 자기희생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카라마와 탄자니아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딱 자신이 겸사 할 수 있을 만큼의 느슨한 도움을 줍니다.

예를 들어, 사기당해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굳이 불러서 밥을 챙겨먹이거나 무리해서 큰 돈을 주진 않더라도 우연히 마주치면 겸사겸사 밥을 사주고(하지만 이들은 거의 비슷한 공간을 오갔기 때문에 우연히 누구도 마주치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적당히 빈 방이 있는 사람이 겸사겸사 그를 재우는 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주선해주기도 하고요.

우연히 마주치면 밥을 사줬다 […] 누구나 ‘무리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에 이 상호 부조는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과도한 부담이 발생하지 않는다 […] 그들에게 ‘궁지에 빠진 경험’을 물으면 다들 수없이 겪어본 인생의 위기를 들려준다.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집회에서 조합원들이 말했듯이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분명,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나 그 사람이 나랑 친하지 않고, 내가 처한 상황이 절망적이고 큰 문제를 안고 있을수록요. 하지만 만약 그 사람들이 큰 부담없이 ‘조금씩 겸사겸사’ 도와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이들이 제가 왜 문제에 빠졌는지 시시콜콜한 이유를 묻지 않고 단지 겸사겸사 밥을 한끼 사준다면,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조금 더 도움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까요? 이후 문제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나도 같은 일을 다른사람에게 하고 싶어질 것이고요.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선 이런 작은 도움들이 거의 말라붙은 상황입니다.

우리 속담에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말이 있죠. 열 사람이 밥 한 숟가락을 모으면 한 사람의 밥을 먹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속담을 별 생각없이 생각해왔는데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십시'라는 점이 핵심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만약 한사람이 한사람의 밥을 다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 분명 부담이 될테니까요. (왼쪽) 홍콩 탄자니아인 커뮤니티 사람들이 찍은 단체 사진. 이들은 성별도, 재산도, 직업도 제각각이지만 서로 느슨한 도움을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 연합뉴스, tobito(링크)

*

그런데, 또 하나의 물음표가 꼬리를 잇습니다.

아무리 ‘겸사겸사’라곤 해도, 내 시간과 돈, 노력을 들여 생판 모르는 남을 거두는 건 역시 꽤 귀찮은 일이 아닐까요? 차라리 그 시간과 돈으로 나 혼자 즐기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내 시간과 돈, 노력을 들여 남을 거두다”는 말 자체가 카라마에겐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에겐 생판 모르는 남과 함께 어울리는 것 자체가 심심함을 없애고, 재미난 우연을 자신의 삶에 불러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그런 일에서 구체적인 이익을 얻기도 하지만, 얻지 못해도 상관 없습니다. ‘카라마가 남을 돕느라 힘들겠군...’이라며 존경 혹은 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건, 어떤 면에선 마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고 “친구와 놀아주느라 장하군/고되겠군...”하는 것과 비슷할지도요.

아래의 짧은 대목은, 저자와 카라마가 함께 중고차를 매입하러 방문한 고객들과 함께 택시를 탄 장면의 묘사인데요. 그의 ‘일하는 장면’이란 매양 이런 식입니다.

* (택시운전기사는) “조심해요 [...] 내 생각에 저 사람은, 아마 일본어로 말하자면 야쿠자 두목 같아요”라고 충고했다 [...] 이를 말해주자 [...] 야쿠자 두목이라는 말을 의식했는지 손님에게서 선글라스를 빌리더니 기분탓인지는 몰라도 평소보다 어깨에 힘을 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어쨌든 카라마는 자신을 경계하거나 꺼림칙하게 여기는 운전기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 그들이 불안해져서 도망가거나 길거리에서 승차 거부를 하지 않도록 매일 노력하고 있다.

[…] (어느날 다른 택시기사는) “손님들은 어떻게 해서 돈을 버나요?”라고 솔직한 질문을 던졌다. 카라마가 투철한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 사실 아프리카인은 마술을 부려서 돈을 벌고 있으며 자신도 마술사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 도착할 즈음에는 운전기사와 완전히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요금을 지불할 때가 되자 카라마는 즉각 “우리는 이제 친구니까 택시 요금 좀 깎아줘요”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운전기사는 바로 “노 머니, 노 프렌드!”라고 딱 잘라 대답했고 카라마는 “어이쿠야”하고 외치며 요금을 지불했다. 카라마와 손님들의 매입 투어는 매번 놀라움과 기대가 넘치는 여행이다.

* (업무를) 세련되게 만든다면 홍콩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동료와의 공존이나 매일매일의 즐거움을 비즈니스와 구분짓는 쪽으로 흘러가기 쉽다. 동료에게 베푸는 친절과 기쁨과 놀이를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거나 성실하게 일하기 위해 […] 기쁨과 놀이를 찾는다는 가치 전도가 생겨나게 된다. 카라마가 이야기했듯이 이는 눈곱만치도 즐겁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그는 인맥도 넓고 수완이 좋기에, 많은 업자들이 동업을 권했지만 번번이 거절해왔다고 합니다. 자신의 수완을 있는대로 끌어다 돈을 버는데만 쓰지도 않았고요. 그런 삶이 재미가 없기 때문이죠.

그 대신 카라마는 낯선 나라에서 온 스와힐리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 인류학자를 데리고 다니며 놀리거나 수다를 떨거나 파티를 여는 일에 관심이 있고, 이런 책이 나올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처럼 베푸는 사람이 부담이 없고 진심으로 그 행위를 즐기고 있기 때문에, 받는 사람도 권력 관계나 부채감 없이 선의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4.부서진 울타리와 해방 : 믿을 만한 사람만 믿으면 되는 걸까?】

2. #부서진 울타리 :

이어, 홍콩 탄자니아 커뮤니티의 주된 특징은, ‘겸사겸사’ 외에도 도움을 주고받기 위한 자격조건 등의 울타리가 부서져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누구나 -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범죄자였던 사람이든, 잘나가는 사업가든 망한 사람이든 간에, 자유롭게 제각기 커뮤니티에서 어울릴 수 있고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고위험 사업에 투자했다가 혹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협업을 했다가 사기를 당하는 등 “자업자득”인 경우에도, 도움을 줄만한 가치가 없어보이는 사람에게도 이들은 이유를 묻지 않고 돕습니다.

왜냐면 자격조건을 제약하기 시작하는 순간 커뮤니티는 굉장히 좁아져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구를 도울 때 이유와 그 사람의 내력을 꼼꼼하게 따지고 구설에 올리는 공동체라면, 누구도 섣불리 도움을 구하러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돕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누굴 도울지, 도울지 말지 등을 판단하는 데 큰 공력을 쏟아버리고 말겠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 나 역시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 세세한 규칙이나 규범을 가능한 한 만들지 않는다/애매한 채로 둔다 [...] 최종적으로는 ‘여러 사정이 있으니 세세하게 따지지 말자’는 결론에 도달한다 [...]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데는 몇가지 배경이 있다 […] (우선) 이들은 조언을 요청받지 않는 이상 타자의 비즈니스와 행위에 끼어들지 않기에 그 사람의 ‘사정’을 자신이 속속들이 알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다 […] 그들만의 독자적인 인간관, 주체관이 있다. 어디까지가 ‘자기 책임’이고 어디부터가 ‘불운’의 영역인지를 묻는 것은 원래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이들은 애초에 개별적인 실천, 행위의 귀결을 타인에 대한 인물평가-노력이 부족하다, 생각이 안이하다, 별로 착하지 않다 등-와 연결지어 말하는 것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다 […] 완전히 당사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나 될대로 되라는 기분에 빠질 때가 있어 […] 일이 꼬여 범죄자가 되거나 불치병에 걸린 동료가 있다 해도 그런 녀석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 누구나 처한 상황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 “저 사람의 연인도 함께한다면 그는 좋은 녀석이니까 놀러 가”라고 ‘지금’의 상황에 한정하는 형태로만 타자를 평가한다 […] ‘민낯’을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관의 불변된 자기같은 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 상대를 불문하고 돕는 까닭은 자신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느날 카라마가 내게 물었다. “사야카, 사기를 당했을 때 가장 도움이 되는 정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내가 “음...경찰이나 변호사?”하고 대답하자, “아니지. 그야 사기꾼의 친구인 게 당연하잖아. 누가 나중에 도움이 될지 모르는거야 […] 중요한 것은 동료의 숫자가 아냐, [유형이 다른] 이런저런 동료가 있는지야.”라고 말한다 […] 장사가 늘 순조롭지는 않다 […] 실패와 궁지로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이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어떤 ‘융통성’같은 것이 관찰된다. 이 융통성은 이들이 구축한 시스템에 의해, 이들이 타자와 살아가는 가운데 길러온 지혜에 의해 저절로 재귀적(*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 순환)으로 창출되고 있는 것이다.

“자업자득”이라든지 “넌 왜 그러고 사니?”란 질책 없이, 누구나 배고프고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겸사겸사 곁을 내어주는 이들을 바라보며 저자는 씁쓸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주변에 당당하게 내 상황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고요.

실제로 이처럼 누구나 도와준다는 것은, 거꾸로 생각했을 때 -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적어도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든든하고 촘촘한 안전망인 것이죠.

나는 탄자니아인들과 함께 있을 때 종종 생각한다. 만약 해외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데 일본인 동포와 운좋게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면 […] 대부분의 일본인은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잘 알아보지도 않고 위험한 행동을 한 결과 궁지에 처했다고 한다면 “무모하다” “생각이 짧다”며 설교를 하거나 […] 무엇보다 ‘자기 책임’을 내면화한 나 자신이 우연히 만난 낯모르는 동포에게 폐를 끼치기를 주저하게 된다. 내가 투기성 높은 장사에 도전히 무일푼이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 위기에 응답해줄까. 하물며 현지에서 경찰의 신세를 지게 되면 “자업자득”이라고 나를 책망하지 않고 받아들여줄 사람이 있을까.

[...] ‘성실히 노력해 리스크를 관리하고 가능한한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며 산다. 이야말로 성인이자 사회인의 자세다’라는 규범이 너무 강고해진 나머지 무모한 도전 뿐아니라 ‘막상 해보면 쉬울 것 같은’ 도전조차 생각만 하고 말기 쉽다.”

그리고 단지 수많은 리스크에 대응하는 법이 아닌 리스크를 방지하기 위해 예비하는 삶은 분명 저자가 말했듯, 방어적이고 천편일률적이고 도전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럿이 손을 잡는다면 정말로 별거 아닌 문제도, 혼자서 모두 다 해결하기 위해선 온힘을 다 쏟아야만 가능하니까요.

미국 사회학자 제니퍼 실바가 쓴 <커밍업쇼트>는 미국 젊은이들의 갑갑한 삶을 '리스크 관리'라는 차원에서 살펴본 흥미로운 책입니다. 이들은 중산층으로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다리는 무너져있고, 이들은 모든 삶을 오로지 '리스크 관리'라는 차원에서 계획합니다.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한다는 느낌으로요. 다만 과연 그 모든 것을 '혼자' 해내도록 하는 것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왼쪽) 최신 플랫폼들은 빅데이터로 신용을 파악해 애초에 자격(범죄이력, 자산 등)이 안되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 리시올, Unsplash

그야말로 새롭고 재밌는 만남, 도전에 대한 생각은 없이, 거의 모든 자신의 평생과 공력을 단지 '여차할 때'에 남에게 손 안벌리고 대비하기 위해 쏟아넣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대체로 오늘날 대부분의 선진국 중산층 사람들의 삶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낯선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삶보다도, 혼자 모든 걸 짊어지는 삶 쪽이 훨씬 더 “무모”한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

책에서 마지막으로 저자는, 오늘날 ‘낯선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저절로 대신해주겠다는 신용 플랫폼, 높은 울타리를 두른 커뮤니티, 공유경제의 삐까뻔쩍한 전망에 물음표를 던집니다.3)

이런 플랫폼은 마치 모두를 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리즘에 의해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조금이라도 ‘일반’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은 제외되죠. 아마 청킹맨션의 탄자니아 공동체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제외될 것입니다.

공유경제에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한다. 타자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잉여자원을 더 가져 선한 사회 실현에 공헌 가능한 ‘시민’과 밀접하게 관련된 공유경제에서 누락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금 0원, 주소 불명, 직업은 사기꾼, 취미는 방랑입니다.”라고 회원 가입란에 써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 이들이 ‘겸사겸사, 무리하지않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 그 대단치 않음이야말로 각자의 인생을 찾아 홍콩에 와서 각자 방식대로 살아가는 개별 인간의 자율성, 서로간의 대등함을 저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 평가경제, 평판자본, 신용점수는 전부 신용의 불이행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을 불이행할 것 같은 사람을 배제하는 아이디어다. 공유경제는 ‘공유’라는 단어로 은폐되기 쉽지만 누구에게나 열린 구조가 아니다.

실제로 레이첼 보츠먼은 <신뢰 이동>에서 앞으론 사물인터넷, 알고리즘 등을 통해 신규 기술이 분산적 신뢰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하는데요. 과거엔 누가 믿을만한지(누가 내가 준 선물을 안전하게 돌려줄지)를 일일이 번거롭고 위험하게 결정해야만 했는데, 앞으론 상당부분을 기술이 자동적으로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거죠.

카마라와 사람들이 매일같이 낯선 사람들을 마주하고, 농담을 걸거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달리요.

하지만 서로간의 도움이 전혀 필요없이 모든 것이 안전하게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는, 어쩌면 그야말로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겐 도움이 닿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불안에 떨며 살게 되는 사회일 것입니다.

지금까지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요.

✏️

“나는 어린 시절 살았던 공동주택 이웃들의 우정, 그저 모든 게 상황에 좌우되던 그 관계들을 자주 떠올린다. 필요한 순간마다 말없이 알아주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검고 동그란 눈의 여자들 […] 옆집 여자 이름이 아이다든 골디든 그게 뭐 그리 중요했을까? 이웃이 있으면 됐지 […]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대체 불가능한-본질적인-자아라는 개념에 교육까지 받은 고도의 지성을 이토록 쏟아부은 적은 역사상 없었다. 심리적으로 조금이라도 불편한 건 절대 참아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우연적 타자 취급을 받은 적도 역사상 없었다.”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3) 이 부분은 얼핏 직전에 보내드렸던 레터(링크)의 챕터4에 소개했던 아즈마 히로키의 '겐론'과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분명 겐론은 일정금액의 회비를 낸 회원들을 대상으로 댓글란 등을 운영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회비 외에는 어떤 자격조건(국적, 학벌, 신용도, 직업 등)을 걸지 않는다는 점에서 겐론도 그렇게까지 '문턱이 높은' 커뮤니티라고 보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공동체의 적절한 규모와 그 안에서 의미있는 소통, 선물을 위해 서로가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규율의 여부 등이 좀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이와 관련해서는 마침 지난 회차 피드백 중 의견을 주신 연구자님이 계셔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피드백란을 참조해주세요.

【5.맺음말】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그간 느슨하게 공동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여럿 다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엔 ‘제3의 공간’이 없고(링크), 얼굴을 마주보고 작은 공동체에서 즐거운 대화를 하는 경험도 찾아보기 어렵고(링크), 커뮤니티에선 마음을 터놓고 말하기 어렵고(링크), 그렇다고 현실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눌 일도 없고(링크), 정작 솔직한 마음 속 이야기는 아무데도 털어놓지 못합니다(링크).

우리는 각자 이런 생각을 하고, 관련 기사들을 읽을 때마다 시무룩해지거나 불안해하곤 합니다.

저 또한 그간 이런 주제들에 끌렸던 것은, 저 역시 불안해하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번 이런 회차를 쓰면서도 '그러면 어떻게 하지?'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닥치곤 했습니다.

*

다만 이번 편지를 쓰면서, 실제로 그런 일들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에 대한 약간의 구체적인 힌트들을 얻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리하자면, 핵심은

1. 그냥 (지카우치 유타)

2. 대충 (오가와 사야카)

입니다.

이는 지나치게 간단하고 헐렁해보이지만, 실은 오늘날 크게 간과되는 포인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면 우리는 선물이 아닌 저주와 부담을 상대에게 가하게 되고, '대충' 하는 것이 아니면 지속가능하지 않으니까요.

*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터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하나 더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재미’입니다.

일단 아무리 '대충'이라고 하더라도 재미가 없으면 지루해져서 계속 하고싶지 않을테고요. 오늘 편지에서 함께 읽어본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에서도 개인적으로 크게 느낌표가 떠오른 부분은, - 우리가 서로에게 도움을 줄 때 단순히 자기 희생적 마음이 아니라, 누구와 만나든 내가 상상력을 발휘해 그 사람과 재미난 우연을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떠올려야 한다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의 요청을 어떻게 해서 ‘윈윈’의 이익으로 변환할지,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즐거움으로 바꿀지는 장사꾼으로서 각자의 기지에 달려있다. [...] 각기 다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가능성에서 주고받기의 기회를 발견해내는 각자의 ‘지혜’...”

-오가와 사야카,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어쩌면 조금은 서툴더라도 우리가 이런 중요한 원칙들을 잊지 않고,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씨앗을 조용히 뿌리다보면, 우리 삶에도 조금씩 도움의 망이 생기고 비로소 우연한 세계가 다가오지 않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일은 역시 너무 '어깨에 힘주고' 하면 구르기 쉽기 때문에 - 어깨에 힘을 좀 빼는 쪽이 좋을지도요.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지카우치 유타, 김영현 옮김,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 다다서재, 2025.

-이 책의 일본어 원제는 '세상은 증여로 이루어져 있다'이고요. 책을 읽고 나면 한국어판 제목도 나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제목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본문에서도 소개했지만) 얼핏 제목만 보면 마치 선물은 항상 받는 사람에게도 - 주는 사람에게도 기쁨인 짱좋은 것이다 라는 느낌이지만, 실은 선물이 사실상 선물이 아닐 경우에는(즉 증여의 요건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했을 경우엔) 오히려 권력을 만들고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저주(=타인의 삶에서 자유를 빼앗는 것)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레터에서 그 부분에 주목을 해보았고요. 그렇다고 해서 선물을 주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선물을 주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오가와 사야카, 지비원 옮김,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갈라파고스, 2025.

-일본 인류학자인 오가와 사야카가 홍콩 청킹맨션에서 탄자니아 공동체를 참여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책입니다. 책의 부제는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입니다. 이 책도 제목을 보고 너무 궁금해서 (청킹맨션? 중경삼림? 보스? 뭘 알고있다는 거지? 지하조직 얘긴가?...), 실은 별 사전정보 없이 읽기 시작한 책인데 빨려들듯 마지막장까지 읽게 되었습니다. 인류학책이 으레 그렇듯 일단 사람이야기가 흥미롭고요(저자와 카마라와의 일상을 보면 시트콤같기도 합니다 ㅎㅎ). 단지 재미난 이야기를 넘어 '신뢰'와 '증여'에 대해 다른 연구저작들을 아울러 깊이있는 통찰을 해냈습니다.

사실 '증여'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데요.(지가우치 유타만 해도, 아래에 소개한 우치다 다쓰루의 증여론을 반박합니다) 오가와가 소개한 증여가 독특한 점은, 카마라 등이 단순히 '순수한' 의미(?)에서의 증여를 한다기보다는 그 안에서 항상 나름의 이익을 얻는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이익은 꼭 '등가교환'이라기보다는, 마치 길을 걷는 겸사 들꽃을 본다 혹은 너랑 같이 있는 겸사 잼얘를 떠든다 정도의 느낌이긴 합니다. 어떤 '낯선 타자'에게서든(심지어 사야카에게서도) 자신과 연결이 될만한 이익/가능성을 겸사겸사 '발명해내고', 그에게 있을 자리를 주고, 착취가 아니라 공생해내는 능력은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능력이야말로 공동체와 신뢰가 만들어진 기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레이첼 보츠먼, 문희경 옮김, 『신뢰 이동』, 흐름출판, 2019.

-오늘 챕터 4에 추가했다가, 분량 관계상 간단한 언급 외에는 제외했습니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는 몇년 전부터 꽤 오랜 시간을 두고 읽게 된 책입니다. 오래전부터 '신뢰' 문제엔 관심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 책의 논조에 동의하기가 어렵고 껄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인데요. 이번에 위의 두 책을 읽다보니, 그 껄끄러움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저자가 나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스템화된 신뢰'가 모든 것을 자동으로 가능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자는 마지막 결론부에 시스템화된 신뢰만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진 않다고 짧게 언급하긴 하지만, 짧게 언급하고 말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히도(?) 오가와 사야카의 책에 아주 짧게 이 책이 언급되기도 하고, 두 책이 서로 다른 부분(혹은 같은 것의 다른 측면)을 비추고 있는 만큼 두 책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 같습니다. 

실은 몇년 전부터 '신뢰/사기'를 키워드로는 꼭 한번 레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오긴 했는데요. 꼭 책의 주장에 동의하진 않더라도, 신뢰와 관련해 다양한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책이므로 키워드에 관심이 있으신 분께 일독을 권합니다.

우치다 다쓰루·오카다 도시오, 김경원 옮김,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메멘토, 2014.

-일본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와 비평가 오카다 도시오의 대담집입니다. 책의 부제는 '밥을 나누는 약자들의 생존술에서 배우다'고요. 책은 딱히 주제를 두지 않고 여러 이슈에 대해 두루 거침없이 다루고 있는데요. 이중 중반부 이후의 증여론 관련 내용 등이 흥미롭습니다. 사상가인 동시에 무도가이기도 한 우치다 다쓰루는 '개풍관'이라는 도장을 열어 지역에 일종의 '제3의 공간'이자 적당한 규모의 커뮤니티를 오랫동안 운영해왔는데요. 출간으로부터 시간이 좀 흐르긴 했지만, 한번쯤 가볍게 (하지만 내용은 아주 가볍지만은 않은) 읽어볼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개풍관 관련 내용은 근간인 <목표는 천하무적>(링크)에도 소개가 됩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특허 내고 돈 포기한 ‘이상한’ 어부

독서시간: 약 9분 / 글자수: 약 4500자

🖍글 속 한 문장

“지난해 지역 한전 노조원들이 해양 쓰레기 수거 활동에 참여했다. 한 번에 50여 명씩 4차례 활동하면서 쓰레기가 사라지는 걸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김정판 어부는 "혼자 했을 때는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냥 쓰레기를 주워 오는 거지 그게 현실적으로 표가 잘 안 납니다. 근데 사람을 좀 많이 구성을 해서 하면 그게 표가 나거든요"라고 말했다[...]

김정판 어부는 이 특허를 사익을 위해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국가와 지자체가 그의 특허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2022년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공언이었다. 그 사이 그를 부추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아니 그 특허를 갖다가 왜 국가에 줍니까? 그거 돈이 될낀데 돈을 벌어야지"라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경운기 같은 걸 특허 냈으면 내가 먹고 사는 걸 해야 되겠지예. 이거는 경운기가 아니고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필요한 건데 이걸 내가 가지면 되겠습니까? 안 되지. (특허에) 이름 하나만 올라간 것만 해도 뭐 자손 대대로 남을 일인데"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래야 되는 깁니다"라고도 덧붙였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최근 SNS에서 이슈가 된 기사입니다(위의 챕터2에서도 사진으로 잠깐 소개했습니다!). 경남 사천시 죽방렴의 어부 김정판씨(56)는 약 15년간 누가 시키지도, 돈을 받는 것도 아니면서도 해안 쓰레기 문제에 큰 관심을 가져왔는데요. 단순히 관심만 가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거의 매일같이 해양쓰레기를 직접 줍고 또 종류와 양을 기록하고, 죽방렴 원리를 활용한 해양쓰레기 포집 장치 기술 3개를 특허로 등록했지만, 이를 국가가 활용할 수 있도록 했죠.

오늘 레터에서 언급한 '이름없는 영웅'의 대표적인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또한 이 기사를 읽다가 '십시일반'이 떠오르기도 해서 앞부분도 함께 발췌를 해보았습니다.

신뢰성 : “신뢰할만한 것을 신뢰하라?”

Ted(영상·약 10분)

🖍글 속 한 문장

“(우리 사회의) 목표는 더 많은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이 목표가 우습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목표로 할 만한 것이 아니죠. 제 목표는 믿을 만한 것은 더 많이 믿고 믿을만하지 못한 것에는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믿지 못할 만한 것은 믿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 더 많은 신뢰를 갖는 것이 인생의 좋은 목표는 아닙니다. 현명하게 신뢰하고, 신뢰를 거부하는 것이 적절한 목표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가 아닌 신뢰성인거죠. 특정한 측면에 있어서 사람들이 믿을만한지 판단하는 것이죠.”

👤김스피의 블라블라

영국 철학자이자 상원의원인 오노라 오닐이 ‘신뢰Trust’와 ‘신뢰성Trustworthiness’의 차이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한 TED 영상입니다.

그는 사회의 '신뢰'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뢰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요. 이유는 사람들은 오히려 믿을만하지 않은 것(=신뢰성이 낮은 것)을 쉽게 믿는 성향을 갖고 있으므로 사회 전체의 신뢰를 높인다는 애매하고 부작용 많으며 비현실적인 목표보다는, 상대적으로 어떤 대상이 얼마나 '믿을만한지(신뢰성)'를 판단해서 믿을만한 것을 믿고 믿지 못할 것은 단호하게 믿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하지만 흥미롭게도 <청킹맨션...>에서의 카라마 등은 (거의 정반대로?) "특정 브로커를 신뢰할 수 있는 상대와 신뢰할 수 없는 상대로 분류하기보다는, 누구도 신뢰할 수 없고 상황에 따라서는 누구라도 신뢰할 수 있다는 관점에 입각해 개별 브로커가 처한 상황을 헤아리며 한번 배신당했더라도 상황이 변하면 몇번이든 믿어보겠다는 태도(p.276)"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상황이나 맥락, 공동체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이런 태도의 장점은 '개방성'으로 인한 '안정성'이겠죠.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더라도 공동체에서 내밀리진 않을테니까요.

나는 내 인생에 ‘감사’해요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400자

🖍글 속 한 문장

<내 인생에 감사해요>(Gracias A La Vida)가 그것이다. 칠레의 작곡가이자 작사가이고 가수였던 비올레타 파라가 만들고 아르헨티나의 국민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다시 불러 군사정권의 압제에 힘들었던 남미의 민중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이 노래. 지구의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나에게도 위안이 되었다.

활동가로서의 삶은 통상의 눈으로 보면 많은 것을 포기함으로써 더 깊은 것을 얻는 과정이었다 [...] 할 일 많은 나라에 태어난 활동가로 자임하는 삶은 좌절하기 쉽다. 아니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 더 나은 것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런 모든 삶이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활동가’니까. 그렇지만 이런 투쟁적인 삶은 그 자체로서 발광할 수 없다. 나 자신이 삶을 사는 의미를 찾아야 했다 [...] 삶에, 살아 있다는 것에, 살아 내려는 몸부림 자체에 감사할 수 있는 지혜를 나는 <그라시아스 알 라 비다>에서 얻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아르헨티나의 국민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노래를 이창수 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가 소개한 칼럼입니다.

사실 그간 제 귀에 '항상 감사하라, 작은 것에도 감사하라...'는 말은 다소 진부하고 뭉툭하게 들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지카우치 유타의 책을 읽으며, 그가 강조한 '감사'의 힘에 새삼스럽게 큰 느낌표가 떠올랐습니다. 사실 레터에는 분량 관계상 길게 적진 못했는데, 모든 선물에 선행하는 것은 자신의 삶 주변의 모든 것이 수많은 '감사할거리'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읽고 있는 수많은 책, 읽어주시는 연구자님, 맑은 하늘...이 모든 것을 단지 조금의 돈을 냈다는 이유로 혹은 공짜로 제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사의 마음은, 저자에 따르면 조건없는 증여를 시작하는 핵심 원동력입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받아 누리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대가 없이' 나누어준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증여에는 자기희생으로 인한 원한보단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안락함이나 모든 것이 충족된 데서 오는 기쁨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어려움과 낙담...'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알게 되고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깨우치고 도달해내는 기쁨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혹시 노래를 들어보지 않으셨으면 함께 들어보시죠.(노래링크) 저는 지금 이 노래를 들으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정도 실례는 늘 하며 살고 싶어요”

독서시간: 약 4분 / 글자수: 약 2200자

🖍글 속 한 문장

“요즘 젊은 세대들은 ‘무해한 관계’를 추구하잖아요. 저는 그게 추상적일뿐만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 “서로 선을 넘지 않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생각을 강박적으로 갖고 있는 시대다. 그러다보니 서로에게 질문을 하거나 호의를 갖고 소통을 시도하는 것조차 검열을 하는 것 같다”

그는 스스로를 “늘 먼저 선을 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선을 슬쩍 넘어간 자신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었지만 불쾌하게 여기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는 사과를 했다. 그를 아끼는 누군가로부터 ‘왜 자꾸 선을 넘어 사과를 하고 다니냐’며 “다정한 타박”을 듣기도 했다. 그는 “이 정도의 ‘적당한 실례’는 늘 하면서 살고 싶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적당한 실례>를 쓴 작가이자 스탠드업코미디언 양다솔씨 인터뷰입니다. 그는 평생 적당히 '선을 넘으며' 사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하는데요.

오늘 레터에서는 '선물' '증여'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실은 오늘 이야기한 내용들은 '선 넘기'와도 연결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면 선물을 받는 것은 "상대방이 선물을 준 사람과 관계를 맺기로 결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선물이 주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는 오늘 레터를 쓰면서 세상의 모든 관계나 사회, 신뢰, 공동체 등을 선물의 부산물 같은 것으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여튼, 오늘 본문에서도 적었듯 선물이란 실은 중립적인 단어에 가깝고('호수성') 그 선물은 많은 경우 타인에겐 기쁨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론 그 방식에 따라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간극'은 너무도 미세하기 때문에 항상 그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죠. 실제로 오늘 레터에서는 아주 길게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얼핏 홍콩 탄자니아인 커뮤니티는 '유토피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당연히 서로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그 와중에도 계속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관계를 느슨하게나마 유지해가는 것이겠죠. 오늘날 최첨단 기술이 그 모든 것(안전한 관계맺기, 신뢰 등)을 대신해준다는 환상이 있지만, 결국 우리 각자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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