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남인과 소북 등이) 서로 한패가 되고 자신의 패거리에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일이 생기면 벌떼처럼 일어나 논란을 일삼고 있다.” 오늘 우리의 정치 상황 같지만, 이는 1709년 음력 1월4일 엄경수가 남긴 당시 조정의 상황이었다.
엄경수의 이 평가는 1708년 음력 12월13일 이윤문이 올린 강원감사 송정규 탄핵 상소 때문에 나왔다. 이 상소에 따르면, 송정규는 강원감사 직위를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했다. 특히 그는 공물을 거둘 때, 백성들에게는 최고급 인삼을 징수하고 조정에는 낮은 품질의 인삼을 올려, 그 중간 이익을 취했다. 게다가 면포나 목화를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싸게 구매한 후, 제값을 팔아 이익을 취한 정황도 있었다. 이로 인해 강원도 민심이 흉포해져 감사의 신변을 위협하기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탄핵을 핵심 업무로 하는 사간원 헌납 이윤문이 송정규의 파직을 청한 이유였다.
그런데 이윤문의 상소 내용은 송정규와 같은 기호 소론계 관료이자 이 기록을 남긴 엄경수의 평가와는 달랐다. 그는 송정규를 청백리의 대표라고 평가하면서, 이윤문의 상소는 당파에 따른 사감(私感)에서 나왔다고 강변했다. 이유도 있었다. 오래전, 당색이 남인이었던 오시복이 제주도로 유배 간 일이 있었는데, 당시 제주목사였던 송정규는 그를 꽤나 박하게 대한 모양이었다. 그 섭섭함이 남인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될 정도였으니, 송정규의 처사가 남달랐던 듯했다. 이 와중에 근래 송정규가 강원감사로 있으면서 원주목사에 대한 인사 평가를 했는데, 남인이었던 원주목사 심중량에게 최하 등급을 주어 그를 파직시킨 일이 있었다. 남인들 사이에서 송정규가 남인들을 대놓고 핍박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엄경수는 이 사실들을 근거로, 이윤문이 남인을 대표해 송정규를 모함한다고 평가했다(엄경수 <부재일기>).
엄경수의 평가만 보면, 이윤문은 공적 임무를 사적 보복에 이용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이 사건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평가에 따르면, 엄경수 역시 기호 소론이란 당파의 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사관은 송정규에 대해 “괴상하고 각박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라며, 이런 인물이 같은 당파인 최석정의 추천을 받아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강원도의 감사가 되었다고 했다. 당연히 강원도에 산재한 경제 문제를 풀 능력이 없었고, 균전(均田) 시도마저 실패했다. 여기에 잔인하고 각박한 행실까지 더해져, 강원도 민심이 완전히 이반되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사관은 송정규에 대한 탄핵을 시원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기록했다.
사관은 이윤문의 탄핵 동기에 당파 입장에 따른 감정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송정규 역시 엄경수 평가처럼 청백리는 아니었던 듯하다. 사관의 평가에 따르면, 강원감사로서의 정책 실패와 그의 잔인한 행실에 대한 탄핵은, 그것이 비록 사감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공적 가치가 컸다. 사적 감정에 따른 탄핵은 당연히 옳지 않지만, 그것이 고위 관료의 정책 실패를 드러내고 그의 잔인한 행실을 견제할 수 있다면, 공적 이익은 클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정치적인 ‘당(黨)’은 같은 정치 지향성을 기반으로 공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다른 정치적 지향성을 가진 당과 경쟁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실현하기 위해 반대 당과 대립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같은 당 사람들과 연대하고 상대 당 사람들과 다툴 수도 있지만, 이는 다툼이 주는 손해보다 권력 견제와 힘의 균형에서 오는 이익이 더 크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가 지나쳐, 다른 당이기 때문에 청백리가 탐관오리가 되고, 같은 당이기 때문에 탐관오리가 청백리가 되면, 이때부터 우리는 더 이상 그 당의 공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내란의 범죄마저 같은 당이기 때문에 옹호한다면, 우리는 그 당의 공공성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