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서초동’의 한 장면. 빚을 갚지 못해 살고 있는 공공임대주택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피고(장현석)를 도운 강희지 변호사와 채권자인 은행을 대리한 안주형 변호사가 공익 논쟁을 벌이며 맞붙는다. 은행 쪽에 유리하게 진행되던 소송에서 피고에게 유리한 최신 판례가 등장하고, 이를 강희지가 피고에게 전달해 법원에 제출하면서 은행은 패소하고 채권 집행이 가로막히게 된다.
강희지는 “집을 잃고 나앉으면 그 한 사람의 세상은 송두리째 다 무너지는 것”이라며 “공공임대주택은 어려운 사람을 위한 제도인 만큼 그런 사람을 쫓아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안주형은 “은행이 이제는 장현석씨 같은 사람에게 대출을 해주지 않을 것”이라며 “한 사람의 세상이 공익이냐. 개별 사건의 한 측면만 보고 공익을 판단하는 건 오만일 수 있다”고 반박한다. 이 대화 뒤 이어진 장면에서 공공임대주택 대출 요건을 갖추고 은행에 대출 신청을 한 누군가가 대출을 거절당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주거 안정이라는 공공복리적 가치와 채권자의 정당한 채권 회수에 대한 각자의 논리가 맞선 이 장면이 떠오른 건 저신용자의 이자 부담과 관련한 이재명 대통령의 지난 9일 국무회의 발언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서민금융에 대한 근본 대책 마련을 당부하면서 저신용자의 대출금리를 낮추려 고신용자의 대출금리를 인상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 대통령은 “경제 성장률이 1%대인 시대에 성장률의 10배가 넘는 이자율인 15%를 넘게 주면 서민들이 살 수 있느냐”며 “금융사가 고신용자와 초우량 고객에게 초저금리로 돈을 많이 빌려주는 데 0.1%(포인트)만이라도 부담을 조금 더 지워 금융기관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15.9%보다 좀 더 싸게 빌려주면 안 되나”라고 제안했다.
대통령이 직격한 것은 개인 신용 평점이 하위 20%에 해당하는 최저 신용자를 위한 서민금융 상품인 ‘햇살론15’다. 연 15.9% 고정금리로 최대 2000만원까지 대출 가능하다. 서민금융진흥원(서금원)의 보증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 15.9%에서 보증료율은 9.9%, 은행 이자가 6%다. 고신용 차주의 마이너스 통장 금리가 6%대인 걸 감안하면, 사실 최저 신용자의 신용점수로는 받을 수 없는 금리 수준이다. 부실 위험도 크다. 연체가 발생했을 때 서금원이 대신 갚아준 경우(대위변제율)도 지난해 말 기준 25.5%에 이른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지적했듯 금리는 ‘위험의 가격’이다. 은행 등 금융회사 입장에서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할 가능성이 커서 돈을 떼일 위험이 커지면 금리를 높일 수밖에 없다. 위험은 그대로인데 공공의 책임을 앞세워 저신용자에게 적용하는 대출금리를 낮춰 은행이 부담 혹은 감수해야 하는 손실이 늘어나게 된다면 결국 이들을 상대로 한 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익히 알고 있는 시나리오다. 금융 취약 계층의 고금리 부담을 줄이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법정 최고금리 인하(24%→20%)에 나선 뒤 합법적인 대부업체 등이 저신용자에 대한 대출을 줄이면서 이들 금융 취약 계층은 사채와 같은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리게 됐다. ‘신용 사각지대’에 빠진 이들은 통계에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채 천문학적인 고리(高利)의 늪에 빠져 있다.
저신용자 금리 인하와 관련한 대통령의 발언은 선의의 역설에 대한 우려뿐만 아니라 아니라 ‘신용 갈라치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고신용자=부자’라는 프레임을 덧씌워, 고신용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대출 금리 등을 산정할 때 담보 등을 따지지만 고신용과 저신용이 자산 규모와는 직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고신용은 상환 이력 등을 감안한 것으로 빚을 제때에 갚고 각종 공과금과 요금을 연체하지 않는 등 성실한 경제 활동을 통해 신용 점수를 관리해 얻은 것이다. 그런 만큼 저신용자의 대출금리를 낮춰 주려 고신용자에게 부담을 지우자는 주장에 “사고 많이 내는 운전자의 보험료를 깎아주려고 무사고 운전자의 보험료를 올리자는 셈”이란 반발까지 나오는 것이다.
금융 취약 계층의 부담을 줄이고 이들의 경제 활동을 돕는 건 중요하다. 그렇다고 금융과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선의로 포장한 관치 금융으로 부실 채권이 늘어나 은행 등이 흔들리면 그 피해는 사회 전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쉽게 잊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은행의 돈은 예금 등으로 고객이 맡긴 돈이지 나랏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