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되다.
사할린 섬에 한국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일찍이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였다. 이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한 러시아와 일본은 척박한 사할린섬의 석탄, 광산 개발, 석유 개발, 어업, 임업 등을 위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심지어 유배 온 죄수들도 노동에 동원할 정도였다.
당시 조선은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 내기 어려운 위태한 상황이었으므로 이 시기에 많은 농민과 육체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외국으로 떠났고 사할린도 그 중 하나였다. 다만 오늘날의 사할린 한인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 이주 및 징용당한 이들과 그 후손이다.
가라후토로 팔려간 이쁜 고모
한국에 영구 귀국하고 십 년 만에 다시 밟아보는 나의 고향 전라도 공진리는 지난번 모습과 너무 달라져서 실망스러웠다. 우리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터 주위는 20년 전 통영대전고속도로가 신축돼 주위 경관이 시멘트로 덮여 있다. 흙 내음과 함께 유유히 흐르던 개울 길과 촌내 길들은 두터운 아스팔트로 포장됐다.
강 건너 옹기종기 모여살던 한옥도 사라졌고 길옆에 줄지어 서있던 집들도 새로 지은 건물들로 탈바꿈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세월의 무상함을 몸소 느꼈다.
잠시 눈을 감고 100년 전 공진리 마을을 상상해 봤다. 아버지 형제자매들이 개울가에서 미역을 감으며 물장난하는 모습,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밭고랑에서 일을 하시는 모습, 선남선녀가 만나 신줏단지를 보내는 모습.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잔치, 사랑스러운 아내와 믿음직한 남편, 시부모님 모신 신접살림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가족들.
그러나 그다음에는 일제의 강제 모집으로 머나먼 이국땅 사할린(일 가라후토)으로 끌려가는 모습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마음이 아팠다. 공진리 현지 주민들 몇 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 조상의 공진리 옛 모습과 밀양 박씨의 가문을 기억하지 못했다.
같이 살았던 이웃사람들과 아버지의 어린 시절 친구분들은 강제동원돼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고향땅을 다시 밟으신 분들도 계셨지만 나는 70년이 흘러 아버지의 고향 본가에 올 수 있었지만 하늘길과 바닷길이 막혀서 너무 늦게 온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집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고모의 출가
19세기 말 공진리에서 나의 할아버지 박인환이 태어났다. 박인환은 형과 함께 아버지 박세식과 어머니 이 씨를 모시고 살았다. 박 씨 가문이 이 전라북도 땅에 뿌리를 박은지 이미 몇백 년이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박인환은 김해 김씨 아가씨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셨다. 공진리에 땅도 10여 마지기가 있었고 앞산이 보이고 냇가가 흐르는 30평짜리 한옥에서 살았다. 추석이 지난 어느 날 안성면 관청에서 일본 경찰과 함께 조선총독부 직원이 와서 박인환을 찾았다.
“에이, 다카하라! 고치고이!
조선총독부는 부동산의 소유자가 지정한 기간 내에 자기 소유의 토지를 신고하고 일본 재정 관청이 그 소유권을 확인할 전권을 가지고 있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일본이 조선에서 토지 등기를 실시하고 있다.
"이 땅이 너네들의 땅이라고 증명하는 서류를 보여주게"
“이 땅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종손 토지에요"
당시 할아버지가 혼자이고 어린 나이였고, 돈을 주고 토지를 샀다는 기록도 없는데...
일제는 한국 농민이 토지조사사업에 반대하여 신고를 거부한 토지는 물론, 절차를 몰라 신고하지 못한 사유지를 국유화하여 조선총독부의 소유지로 만들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의 기초적인 기반이었던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토지를 약탈한 것이었다. 농민은 오로지 관청의 지도가 명하는 대로, 배급받는 종자를, 지시받은 못자리에 뿌리고, 주어진 못줄로 모내기를 행하고, 정해진 날에 비료를 주고, 김매고, 명령받은 날에 피를 뽑고, 지시받은 방법에 따라 행할 뿐이었다. 거기에는 오로지 감시와 명령만 있을 뿐이었다.
소작권마저 박탈당한 농민들은 산으로 올라가 화전농업을 하거나 전국을 떠도는 임용 노동자가 되었다. 소작쟁의가 심화되면서 피폐한 농촌을 떠나 남부여대하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벌판으로 집단 이주해야 했다.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잃은 할아버지는 급기야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장남 박기수는 양아들로 큰아버지에게로 입양을 가게 되었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박 씨 가족은 살아갈 길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집안의 입이라도 하나 덜기 위해 장녀 박봉순은 시집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무기력한 서방을 만나서 시부모와 시동생이 딸린 가족을 먹여 살리고자 난생처음 마을을 떠나 어린 딸을 들쳐 업고 낯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일본놈 앞잡이로 나선 마을 이장과 모집꾼의 감언이설에 홀려서 일본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만 믿고 바다 건너 먼 길을 떠났다.
내가 1942년 사할린에 태어나서 살게 된 것은 고모가 사할린에 먼저 와서 정착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 말 고모가 우여곡절 끝에 사할린에서 만나서 살게 된 고모부는 일제강점기 건너와서 마누이촌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후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가 일러준 이쁜 고모의 인생사는 슬프고 슬픈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이쁜이 소리를 듣고 자랐던 고모(봉순이)는 조선에 있을 때 시집갔는데 처음에는 행복했다. 남편은 똑똑하고 교양 있는 문화 수준이 높은 사람으로 보였단다. 그 남자는 누에 공장에서 기계 수리공으로 일했다. 봉순이도 그 공장에서 18살까지 근무했는데, 아마 그 남자 쪽 누군가의 눈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봉순이가 퇴근해서 집에 가는데 그 남자가 뒤따라왔다. 대문 앞에서 서 있다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가버렸다. 그 총각은 봉순이의 동네에서 20리 떨어진 촌에서 살았다. 며칠 후 봉순이 뒤를 따라온 그는 용기를 내서 봉순이 집 마당에 들어가 “아가씨! 냉수 한 그릇만 줘요!”라고 애원했지만 봉순이는 눈치를 채고 방에서 나가지 않고 보내버린다.
그 후 매일같이 저녁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집에 와서 기웃거렸다. 고모에게 냉수는 얻어 마시지 못했지만 사나이의 소원은 이뤄졌다. 몇 달 후 봉순이는 그 남자한테 시집을 갔는데 몇 년이 지나 불행이 젊은 가족을 찾아왔다. 딸 둘 낳고 시부모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남편이 집에 안 붙어있고 자꾸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가면 반년 만에 돌아오고, 두 달, 석 달 만에도 오고, 노름해서 돈을 따면 집에 들어와서 그 돈으로 며칠 살다가 나갔단다”
모집광고에 속은 고모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고모네는 땅을 파서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어려웠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소작쟁의로 농촌은 더욱 궁핍해지자 세상이 흉흉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세상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불안해진 봉순이의 남편이 노름판에 빠지기 시작하여 얼마 안 가서 논도 집도 다 팔아먹었다.
그래서 봉순이는 처녀 적 다니던 누에 공장에 나가서 푼돈을 벌어 식구를 부양한다. 정말로 먹고살기 힘들었다.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는 남편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일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봉순이는 낙담했다.
그래서 큰딸은 시부모한테 맡기고 어린 딸을 등에 업고 고향을 떠나서라도 돈을 벌어서 집안 식구들과 어린 두 딸들 입에 풀칠이라도 해서 살려야만 했다.
그때만 해도 “일본 땅에 가면 좋은 일이 있다”고, “일본에 가면 돈 많이 벌어올 수 있다”는 소문이 한국을 휘돌았다. 그래서 이장이 안내를 하여 마을 사람들과 봉순이는 면사무소에 갔다. 거기서 한기호라는 조선 사람이 젊은 여자들을 일본 땅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젊은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는 고운 봉순이를 본 순간 백방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본 땅 가면 그렇게 좋은 일 있은께 한 2년씩 벌어 가지고 오면은 좋지 않은가? 아이 하나 딸려 있는 사람꺼정은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고모는 “어차피 이판사판이니까 가봅시다”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아이를 업은 포데기 끈을 다시 꽉 당기며 결심을 했다. 그렇게 말은 하고 집에 돌아왔지만 봉순이는 며칠 밤낮 동안 생각하고 생각했다. 배고파 우는 아이들 우는소리에 참다못해 아이 하나는 데리고 갈 수 있다는 조건을 수락해 주는 모집에 응하기로 했다.
며칠 후 모집장소에는 낯선 여자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가 무주역을 떠날 무렵 창밖에는 큰딸을 손잡고 나오신 시부모들이 손을 흔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배웅을 했다.
“아가, 아프지 말고 꼭 돌아오거라”
기내에서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봉순이는 어린 딸 정인이가 언니와 헤어지는 게 너무 슬퍼 엉엉 우는 것을 달래느라고 더욱 가슴이 아리고 쓰라렸다.
“아버님, 어머님! 그간 안녕히 계세요. 2년만 있다가 돌아올 겁니다. 정님아! 우리 올 때까지 밥 잘 먹고, 공부 잘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말 잘 들어”
기차는 검은 연기를 하늘 높이 내뿜으면서 마지못해 정거장을 떠나는 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날 역사의 소용돌이가 그들을 영원히 갈라 놓았다.
모집꾼 한기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세 명의 여성을 일본 본토가 아닌 사할린으로 데려갔다. 무정한 사기꾼 한기호가 생전 처음 기차를 타본 시골뜨기 아낙네들을 화태에 끌고 가서 팔아먹을 작전이었다.
때는 한동삼이었다. 오오도마리항은 봉순이 일행을 모진 풍설로 맞이했다. 부두는 조선에서 온 친척들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로 꽉 찼다. 한기호는 여자들을 기차로 도요하라에 데려와서 변두리에 있는 다 찌그러진 오막살이집에 배치했다.
그 집에는 젊은 여자를 사러 온 홀아비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인신매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가 하나 딸려있는 봉순이가 마지막으로 팔렸다.
봉순이보다 16살이나 더 먹은 40대 노총각(리밀선)이 봉순이를 큰돈을 주고 샀다. 다음날 그는 봉순이와 딸을 데리고 오치아이서 130리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에 돌아갔다. 일순간에 인간 사냥꾼에 속아 넘어간 봉순이는 노예의 삶을 지내게 되었고 안 살겠다고 울고불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돈을 못 구해서 도망가고 싶어도 못 가는 불상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고모는 “그래서 할 수 없이 여기서 살았는 게 이렇다”고 한다.
이렇게 고모는 가라후토에서 처음 보는 사내와 또 한 번 결혼을 하게 되면서 이 섬에서 살게 됐다.
고모 박봉순은 1979년 포로나이스크시에서 사망하여 그녀의 유언에 따라 노보예 촌 공동묘지에 있는 김씨 어머니의 묘에 함께 안치됐다.
수천 명의 사할린 한인 여성의 인생은 참으로 비참했다.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된 남편을 따라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국 만 리 혹독한 가라후토 추위를 견뎌내면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가정을 지켰다. 하루 종일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온 지친 남편을 받들어 주고 자식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묻히신 할머니와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리고 멀리서 고모라고 부르고 뛰어가면 말없이 등을 두드려 주던 이쁜 고모가 그립다.
[ 글 = 박승의 전 사할린 국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