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최장수 사법연수원장

2025-11-03

대학가에서 5공화국 반대 집회가 끊이지 않던 1985년 4월의 일이다. 서울대 근처를 지나던 중학생 A양이 호기심에 불발 최루탄을 만졌다가 그만 폭발했다. 손가락이 잘리는 등 크게 다친 A양의 가족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986년 9월 항소심은 1심과 달리 원고 손을 들어줬다. 공안 당국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당시 재판장으로서 “불발 최루탄에 행인이 부상했다면 경찰 과실”이라며 “국가가 치료비 등 모든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용기 있는 판결을 내린 이가 가재환 서울고법 부장판사다.

대전고, 서울대 법대를 나온 가 판사는 대학생이던 1962년 제15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법관의 길을 걸었다. 1977년 법원행정처에 기획담당관 직책이 신설됐을 때 서울고법 판사로 재직하며 초대 기획담당관을 겸임했다. 해박한 법률 지식에 치밀한 업무 추진력까지 갖춰 ‘고시 15회 선두 주자’로 꼽히는 그가 훗날 대법관이 되리라 예상한 이가 많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5공은 한국 정치의 암흑기였다. 자연히 5공 정권이 임명한 유태흥 대법원장(1981∼1986년 재임) 시절도 우리 사법부의 ‘흑역사’로 기억된다. 1980년대 내내 대법원장 비서실장,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으로 승승장구한 가 판사는 김영삼(YS)정부 첫해인 1993년 ‘대법관 후보 0순위’라는 법원행정처 차장까지 지냈다. 이런 그가 YS 임기 동안 끝내 대법관에 오르지 못하자 호사가들은 “5공 때 대법원장 비서실장을 맡은 ‘흠’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1994년 7월 사법연수원장에 보임된 가 판사는 그때부터 무려 5년 3개월간 한 자리에 머물러 역대 최장수 연수원장 기록을 세웠다. 그가 원장으로 있는 동안 배출된 법조인만 다섯 기수 2389명에 이른다. 지난달 30일 85세를 일기로 별세한 가 전 원장의 발인이 어제 엄수됐다. 연수생들에게 공부를 하도 많이 시켜 ‘훈장님’, ‘푸시맨’ 등 별명을 얻은 고인이 정작 가장 강조한 것은 ‘청렴’과 ‘도덕’이었다. 1999년 10월 6일 31년 판사 인생을 끝내는 마지막 강연에서 “법조 윤리를 가다듬어 국민을 위해 더 책임 있는 일을 하라”고 당부한 것의 울림이 여전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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