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보안사 터 미술관에 거대 해골 100개가 쌓인 까닭은

2025-04-11

"매스(Mass):

특별한 모양이나 배열이 없는 많은 양

운집하다

물체의 질량

미사(종교의식)"

각각 높이 1.2m에 달하는 거대한 두개골 100개로 이뤄진 작품 ‘매스’(2016~17)에 대해 론 뮤익(67)은 이 네 줄짜리 메모를 남겼다. 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5전시실, 층고 14m 전시장에 쏟아져 내릴 듯 대형 해골이 쌓였다. 천장 가까이 난 창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대부분 전시장이 지하에 자리 잡은 이곳이 원래 12ㆍ12 군사반란의 주 무대 보안사(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였음을 실감하게 한다. 국립현대 서울관은 2013년 보안사 건물을 리모델링해 개관했다. 론 뮤익 스튜디오의 찰리 클라크는 “작가는 파리 카타콤(지하 묘지)을 방문했을 때 100년 넘는 세월 동안 쌓여 있던 산더미 같은 뼈와 그 뼈들이 무너져 내린 모습을 봤다. 그 강렬한 경험에서 ‘매스’가 나왔다”며 “설치될 때마다 모습을 달리했는데, 이렇게 세로로 쌓아 올리기는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인체 조각으로 이름난 론 뮤익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독일 출신으로 호주에 이민 간 부모는 장난감 제조업자였다. 뮤익은 어린이 TV쇼의 특수효과 제작자로 일했다. 화가 파울라헤구와 협업한 작품을 1996년 영국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선보이며 작가로 데뷔했다. 이듬해 영국 왕립예술아카데미에서 열린 ‘센세이션’ 전으로 이름을 알렸다. 데이미언 허스트 등 ‘yBa(young British artists)’를 세상에 알린 이 전시에 뮤익은 사망한 아버지의 모습을 절반 크기로 재현한 작품 '죽은 아빠(Dead Dad)'를 출품했다.

30년 가까이 활동했지만 인체 모형을 크거나 작게, 오랫동안 공들여 제작하는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총 48점뿐이다. 조각이지만 에디션 없이 한 점씩만 만든다. 뮤익의 아시아 첫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는 시기별 주요작 10점을 모아 소개한다.

전시장에서 맨 처음 만나는 작품은 '마스크Ⅱ'(2002)다. 실제 얼굴 크기의 네 배로, 수염 자국까지 사실적으로 재현한 자소상이다. 모로 누워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감은 얼굴이다. 작가 자신의 얼굴을 재현했지만, 현실에서는 스스로 직접 볼 수 없는 잠든 모습이다. 살아 있는 듯하지만 뒤로 돌아가 보면 텅 비어 있어 제목 그대로 '껍데기'처럼 보인다. 런던의 개인 소장가로부터 빌려온 이 작품은 2021년 리움미술관 재개관전 '인간, 일곱 개의 질문'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가로 6m 50㎝ 크기로 이불을 덮은 채 침대에 누운 여성을 재현한 '침대에서'(2005) 역시 거대함으로 압도한다. 잠에서 막 깨어난 걸까, 잠 못 이루는 걸까? 궁금증을 자아내며 다가가도 눈을 맞출 수 없게 먼 곳을 보고 있는 여인상이다.

그의 인물상은 실제보다 크거나 작다. 꿈이나 신화 속 인물처럼 비현실적인 장면도 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처럼 사실적인 모습도 있다. 식탁 위 암탉과 눈을 맞추고 있는 '치킨/맨'(2019)의 대치 상태는 조각으로 정지된 채 영원히 지속될 것 같다. 팬티 바람 노인의 늘어진 뱃살과 북실북실한 솜털, 놀라 고개를 빳빳이 쳐든 닭이 기묘한 사실감을 더한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아트 갤러리를 위해 주문 제작된 이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처음으로 뉴질랜드 밖으로 반출됐다.

현대판 성모자상이라 할 '쇼핑하는 여인'(2013)도 그렇다. 양손에 묵직한 비닐봉지를 든 여인이 아기띠로 안은 아기를 외투 속에 꽁꽁 싸맸다. 봉지엔 존슨앤드존슨 베이비 파우더나 도브 바디로션, 이유식 병조림 등 아기를 먹이고 씻길 공산품이 그득하다. 아기는 간절히 엄마와 눈을 맞추려 하지만 피곤에 절은 엄마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나는 그때 왜 아기에게 눈 한 번 맞춰주지 못했을까''내 엄마도 저렇게 힘들었겠지' 등 실물보다 작은 이 조각이 아는 사람인 양 공감을 부른다.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젊은 연인'(2013)은 뒷모습까지 봐야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뒤로 돌아가 보면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억지로 잡아끄는 듯하다. 둘은 무슨 관계일까. 그의 조각은 행동으로, 세부 묘사로 많은 말을 암시하며 오래도록 시선을 붙잡는다.

25년간 뮤익의 작업 과정을 기록해 온 고티에 드블롱드의 사진과 영상도 함께 볼 수 있다. 특히 48분짜리 영상 '스틸 라이프: 작업하는 론 뮤익'은 작가의 반복적 손길 속에 그의 인물상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순간을 포착했다. 인공조명이나 음향 없이 작업실의 라디오 소리, 바깥의 새 소리나 개 짖는 소리만 간혹 들리는 침묵의 영화다.

전시는 2005년부터 뮤익을 지원해 온 프랑스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과 공동 기획했다. 카르티에 재단을 비롯한 6개국의 기관과 개인 소장가에게서 작품을 모았다. 홍이지 학예연구사는 “호주에서 온 '매스'만 해도 크레이트(작품 운송용 나무상자) 100개에 각 60㎏ 해골 작품이 들어가 있어 선박으로만 운송할 수 있었다”며 "배로 오는 두 달 사이에 다른 곳과 전시 일정이 겹쳐서도 안 됐고, 그 기간 안에 후원이나 재정적 뒷받침이 가능해야 했다. 설치에만 또 2주가 걸렸다. 많은 행운이 따라야 했던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일본의 모리 미술관으로 이어진다. 7월 13일까지, 성인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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