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열렸지만 ‘혈연·혼인관계 가족’ 중심으로 짜여
진정한 추모·사후 자기결정권 위해 제도 개선 필요
[주간경향] 어린 시절 가족과 연이 끊겨 보육원에서 살다 자립한 30대 청년 A씨가 병에 걸려 지난해 사망했다. A씨에게는 생전에 함께하던 애인과 친구들이 있었다. A씨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가 원하는 추모와 애도는 어떤 모습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애인과 친구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A씨의 장례를 직접 치르지는 못했다. ‘혈연’이나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B씨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탓에 오랜 기간 사랑하며 같이 산 이가 사망했을 때 상주가 될 수 없었다. C씨는 친구가 사망한 뒤 친구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친자식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공영장례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들에 접수된 사례들이다.
누군가 사망했을 때 혈연, 결혼 관계에 의한 가족이 아니라 주변인이 장례 의식을 통해 추모와 애도를 하는 ‘가족 대신 장례’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1인 가구가 많아지고 돌봄의 주체는 다양해지는 추세다. 2020년 보건복지부 지침, 지난해 장사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 개정으로 혈연, 결혼 관계 가족이 아닌 사람도 사망자의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문’은 열렸다. 하지만 기자가 전국의 행정복지센터, 시·구청, 장례식장 등 13곳에 ‘가족 대신 장례’ 절차를 문의해보니 아직 문턱이 남아 있었다.
장례절차에 관한 법은 혈연, 결혼 관계를 중심으로 돼 있다. 장사법은 원칙적으로 ‘연고자’가 시신을 처리하도록 규정한다. 연고자 1순위는 고인의 배우자다. 자녀, 부모, 자녀 외의 직계비속, 부모 외의 직계존속, 형제·자매가 2~6순위다. 7순위가 사망 전 치료·보호하던 기관, 8순위가 ‘앞순위에 해당하지 않는 자’이다. 고인과 혈연, 결혼 관계가 아닌 애인, 친구, 지인 등은 8순위, 즉 맨 끝 순위 연고자에 해당한다.
장사법은 연고자가 아무도 없는 사망자는 지방자치단체가 장례를 진행(공영장례)하도록 규정한다. 지난해 법 개정으로 여기에 예외를 추가했다. 고인과 ‘장기적·지속적 친분관계’를 맺은 사람도 장례를 주관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종교나 사회적 연대활동을 함께한 사람, 고인이 사망 전 유언으로 장례주관자를 지정한 때도 가능하다. 그러나 기자가 문의한 주민센터 6곳은 모두 ‘가족 대신 장례’ 제도가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한 주민센터 관계자는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닌 일반인에 대해서는 규정이나 절차가 없다”고 설명했다. 다른 주민센터 관계자는 “그런 제도는 없어서 그냥 장례식장에 문의하고 (알아서) 진행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시·구청 5곳은 고인이 무연고 사망자로 확정된 뒤 지인이 장례를 치를 수 있다며 보다 자세한 절차를 안내해줬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고인에게 가족이 있는지를 찾고, 가족이 없다는 게 확정되는 절차에 보름에서 한 달가량이 소요되는데 그후에 지인이 장례주관자로 신청을 하면 된다고 했다.
‘가족 대신 장례’를 하려면 고인과의 관계를 증명해야 한다. 한 시·구청 관계자는 “장기간 지속해서 생계나 주거를 같이하면서 생활하고 실질적으로 부양한 경우에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시·구청에선 고인과 같은 주소지에서 거주한 점을 입증하는 서류, 생전에 고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대화 내용, 관계를 말해줄 수 있는 증인, 병원비를 내준 영수증 등을 요구했다. 자료를 보고 장례를 맡길 만한 관계인지 판단한다는 것이다. 직접적이진 않았지만, 일부 관계자와의 대화에선 ‘왜 대신 장례를 하려고 하느냐’는 의심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 관계자는 “사망 후에 문의하라”며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연고자가 시신 처리를 포기하더라도 다른 지인이 장례를 해도 되는지는 별도로 연고자 허락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는 곳도 있었다.
일부 시·구청에선 장례주관자가 되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무연고 사망자로 확정될 때까지 시신을 병원 등에 안치하는데, 많게는 수백만원에 이르는 안치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자체가 주관하는 공영장례는 비용이 지원되지만, 장례주관자가 넘겨받으면 장례비용을 별도로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장례를 치러 제대로 추모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비용 문제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 때문에 공영장례를 연구해온 이들은 ‘장례비용의 공공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생전에 장례 업무 맡기는 일본
공영장례를 진행할 때 지인들이 참여, 참관해 추모할 수 있는지는 지자체마다 설명이 달랐다. 일부 지자체는 가능하다고 했지만, 일부는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한 시·구청 관계자는 “빈소를 오래 차리지는 않고 화장하기 전에 잠깐 의식 행사를 하고 가는 것”이라며 “화장할 때 참관은 가능하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장례를) 장례식장에 위탁하는데 그쪽에서 보통은 (외부인 참여를) 원하지 않는다”며 “간소하게 처리하기 때문에 참관은 따로 확인해봐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지인이 참여할 수는 없다”며 “장례식장에서 염습하고 화장터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빈소는 따로 차리지 않는다”고 했다.
장사법이 개정됐지만 의료법 등 장례절차와 관련된 법이 전체적으로 개선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도 있다.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장례를 치를 수 있는데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는 환자의 직계존속, 직계비속,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존속, 형제자매에게 사망진단서를 떼줄 수 있다. 한 시·구청 관계자도 “(지인이) 장례를 한다고 해도 사망진단서를 떼야 하는데 뗄 수 없으니 힘들 것”이라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무연고라고 하면 아마 떼줄 것”이라고 했다. 한 장례식장 관계자는 지인도 장례를 할 수는 있다면서도 “화장을 진행하려면 가족이어야 한다”며 생전에 고인에게 가족이 없다는 확인을 받아놓거나, 장례주관에 대한 유언을 받아놓으라고 안내했다.
가족구성권연구소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못하는 가족관계 때문에 죽음과 애도 과정에서도 차별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성소수자로 가족과 단절된 고인에게 평소 생활비를 주고 병원에도 함께 다닌 친구임에도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례절차에서 배제된 사례 등을 조사했다. 남은 이들의 애도할 권리뿐 아니라 죽음을 맞는 당사자의 권리로서 ‘사후 자기결정권’의 보장을 위해 제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일본에선 개인이 생전에 비영리사단법인 등과 계약을 맺어 사후의 장례업무를 맡기는 경우가 늘고 있다. 다양한 가족 형태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생활동반자법 제정도 한 방안으로 제시된다.
이유나 가족구성권연구소 공동대표는 지난 10월 3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가족 대신 장례는) 같이 살고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있지만 (꼭 그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가족이 끊어진 상태에서 간병을 하거나 생활비를 대주는 등 삶의 돌봄에 개입된 관계에서도 있을 수 있다”며 “모든 시민이 죽기 전에 자신의 장례를 치러주기를 원하는 사람을 지정할 수 있고, 이를 보편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