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형 전투주의’가 필요하다

2025-02-06

1월19일 윤석열 대통령이 내란죄로 구속 기소되면서,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탄핵 정국은 이제 1차 전환 국면을 지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탄핵을 촉진하는 힘겨운 투쟁을 국민들이 나서서 수행해왔다. 그런데 2차 탄핵 국면과 그 이후를 위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고, 이를 나는 ‘역지사지형 전투주의’라고 표현한다.

전투주의를 세분화해 본다면, 반대 세력이나 쿠데타 세력들과 직선적으로 투쟁하는 ‘돌진적 전투주의’가 한편에 있다면, 상대 진영의 정서와 인식을 함께 살피면서 대응 방식을 다양화하는 ‘역지사지형 전투주의’가 또 다른 편에 있다. 즉 투쟁 의지를 분명히 유지하되, ‘적의 시선을 마음에 품고’ 더욱 복합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후자이다. 시민들의 투쟁과 사회운동은 옳은 것을 위해 투신하는 자세로 행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돌진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변화의 에너지를 정치가 받아안을 때는, 때로는 완급조절도 하고 자기 희생적 모습도 보이고, 스스로의 약점과 오류에 대한 적의 비판까지도 염두에 두면서, 그 국민적 효과를 극대화해야 하는데, 정치는 많은 경우 이에 실패한다.

이런 새 접근을 제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대적인 변화를 투쟁 속에 녹여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화 시절에는 전두환 같은 절대적 ‘악’이 한편에 있었고, 이에 맞서는 ‘선’한 민주·진보 세력이 반대편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도덕적 우위’의 개혁·진보 세력과 ‘권위주의·부패·부도덕성’으로 점철된 보수 세력의 대립 구도가 비교적 분명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로는 이런 선악 구도가 희미해졌다. 보수나 경쟁하는 정치 집단들도, 상대를 ‘악마화’하는 나름의 근거와 사례를 축적해왔고, 진보 진영 역시 과거와 같은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단순한 ‘천사 대 악마’ 프레임만으로는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고, 이러한 시대 변화를 투쟁 속에 포용해야 한다.

‘적대적 진영정치’ 타개 두 갈래 길

둘째, ‘적대적 진영정치’를 극복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정치세력 간에 극단적 대립과 혐오가 심화된 ‘적대적 진영정치’가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하의 미국 정치를 상기하자. 정치는 전투가 되고, 당연히 매사에 전투주의적 기조가 지배적이 된다. 신진욱 교수 표현대로, ‘극우의 주류화, 주류의 극우화’로 이 현상은 더욱 촉진된다. 물론 나라마다 그것이 출현하는 계기나 원인은 다르다. 한국에서도 윤 정부 검찰통치하에서 이것이 심화되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진보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지만, 실재(實在)로서 우리를 규정하고 있다.

이런 구도가 고착되어 존재하다보니, 그것을 극복하기보다는 그것에 편승하는 ‘편한 정치’가 작동하게 된다. 즉 상대방에 대한 적대와 증오, 혐오를 최대한 부추기고, 그것을 통해 자기 진영을 정당화하고 단결시키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악마화된 적대진영은 ‘본질’적으로 나쁘기 때문이다. 악마화를 넘어 과잉 악마화의 경향마저 있다. 그런 극단화의 정점에는 ‘부정선거 음모론’ 같은 것도 있다. 물론 보수의 음모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18대 대선 이후 제기된 진보의 음모론도 있다. 그렇게 진실과 무관하게라도 자기 진영의 공통된 ‘부족주의’적 인식을 만들어내는 통로가 SNS 단톡방이다. 그렇게 해서 ‘탈진실(post-truth)’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자기 편을 결속시키는 언어’가 동시에 ‘상대도 더 굳게 뭉치게 만드는 언어’가 되고,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상황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그 ‘묻지마 최대 공격’의 비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우리 편이 실수하면-바로 우리를 공격하는 ‘적’의 무기가 된다. 그래서 흔하게 중도층은 양비론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도 ‘적’의 시선을 마음에 품는 또는 중도층을 고려하는 역지사지형 전투주의가 필요하다.

셋째, 선거 국면에서는 중도층의 지지 획득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적대적 진영정치에서 흔히 사용하는 언어와 기법은 대체로 극단적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것일 뿐, 중도층을 설득하는 데에는 큰 효과가 없다. ‘윤석열의 전광훈화(化)’라고 하는 보수의 극단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도 지지율 분포가 제자리로 회귀하는 경향을 갖는 것도 나는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피고아’의 지혜로 승리해야

바둑에서 공피고아(攻彼顧我)라는 말이 있다.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승리할 방법을 찾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지사지형 전투주의는 결국 자기성찰을 전제로 한다. 치열한 투쟁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과잉’ 악마화의 이미지로만 전략을 구사한다면, 승리를 담보해주지 않는다. 때로는 ‘적’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우리 편의 ‘과유불급’도 염두에 두면서, 우리 편의 전략을 다면화하고, 그러한 시각을 통해 새로운 언어와 프레임을 만들 때 상대 진영의 완고한 태도를 허물고 중도층 획득도 가능할 수 있다.

이 글은 진보 진영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이지만, 보수 진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비상계엄 이후 보수 세력도 ‘돌진적 전투주의’로 상황을 헤쳐왔다. ‘윤석열의 전광훈화’야말로 보수의 위기인데, 보수는 그 위기를 ‘온 국민의 전광훈화’로 헤쳐나가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 지구적으로도,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인류의 과제이다. 당연히 적대적 진영정치의 진보적 타개의 길과 보수적 타개의 길이 있을 것이다. 전투주의적 기조가 지배적인 현 시기 지구촌 정치에서 진정한 평화 이니셔티브를 발휘하는 쪽이 앞으로 새로운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본다.

독일 파시즘의 이론가로도 유명한 카를 슈미트는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맞는 말이다. 현재의 적대적 진영정치 구도하에서 그 기술은 적에 대한 무한대의 악마화 전술로 표현된다. 그런데 나는 “좋은 정치는 적과 동지의 경계를 유동화하고 재구성하는 행위”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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