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역대 한국 정부는 과거사 인식 차이,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인해 일본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독도 방문으로 한일 관계가 경색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취임 직후부터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면서 아베 신조 정부와 갈등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내리자 양국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며 심지어 ‘죽창가’까지 등장하는 등 최악으로 떨어졌다.
한일 모두 한번 경색된 관계를 수습하기는 쉽지 않다. 정치 지도자는 이런 사안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기 어렵고 관계 회복에는 정치적 자산과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재명 정부의 결단은 주목할 만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와 2023년 강제징용 제3자 변제 합의를 국가 간 약속으로 존중해 뒤집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과거에 머물기보다 ‘미래를 향한 협력’을 선택한 것이다. 정상회담 후 발표한 공동 언론 보도문에서 ‘미래산업 분야 협력 확대와 공동 과제 대응’에 양국의 의지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변환하는 세계 질서에서 한일 협력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양국은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시장경제 체제를 갖춘 ‘유사(類似) 국가’로서 많은 것을 공유한다. 우선 실전 배치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노출돼 있다. 한일 모두 핵 능력을 자체 보유하지 못한 채 미국이 보장하는 핵 억제인 확장 억제에 의존하고 있다. 또 미국의 인도태평양 지역 핵심 동맹국으로 미군이 주둔하면서 중국 견제에 연루될 가능성이 있다. 미 국방부가 가장 중요하면서 유일한 위협으로 규정한 ‘대만해협’에서 충돌이 발생할 때 주일미군이 우선 투사되겠지만 주한미군도 역할이 있는 만큼 결국 한국과 일본 모두 지정학적 긴장 상태에 빠져들 것이다.
아울러 미군 주둔 비용을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예외 조항을 인정한 ‘특별협정(SMA)’을 통해 분담하는 동맹국이다. 이런 특징으로 한일 양국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와 안보 압박에 취약한 것도 유사하다. 한미일 협력도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과 같은 핵심 참모는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한국과 일본이 직면한 전략 환경은 ‘공동 운명체’에 가깝다. 경쟁보다는 협력이 합리적 선택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환경에서 한일이 적극 협력한다면 한미일의 틀에서 대만해협 위기 연루, 방위비 분담, 확장 억제 제도화 등에 긍정적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대만해협 위기와 관련해 한미일이 비공개로 협의를 진행해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의 역할,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요구하는 사항 등을 확인하고 수용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한 일종의 ‘지침’ 마련이 가능하다. 한일이 협력하면 구체적 틀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위기 회피가 아니라 일본과 한국이 공동으로 책임을 나누고 기대를 관리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한일 관계가 새로운 도전을 맞을 가능성도 상존한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후임이 우익 성향을 강하게 대변하거나 한국 내 정치 지형 변화에 따른 반일 감정이 재확산할 위험도 있다. 따라서 ‘셔틀외교’와 같은 지속적인 소통과 대화 채널을 튼튼히 하는 것이 필수다. 양국 정상이 서울이나 도쿄가 아니라 서로의 고향인 경북 안동과 히고현 마이즈루의 허름한 식당에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모습도 그려본다. 그런 담백한 대화가 때로는 냉랭한 외교 무대보다 더 큰 돌파구를 만들 것이다. 누군가 거센 언어로 다시 갈등을 부추기더라도 양국 지도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미래를 고민한다면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추구하는 ‘실용외교’가 정말 유효한지 확인되는 순간일 것이다. 실용외교는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복잡다단한 세계 정세 속에서 한국 외교가 생존하고 도약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 돼야 한다. 한일 관계의 회복은 그 첫 시험대이자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의 관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