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23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른바 ‘과거사’ 문제는 제한적으로 거론됐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으로 불리는 ‘1998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등장하긴 했지만, 2023년 3월 당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도쿄에서 한·일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밝힌 수준에 머물렀다.
한·일 양국 간 좁혀지기 쉽지 않은 민감한 과거사 문제를 두고 무리하게 접점을 찾기보다 협력 가능한 부분부터 찾자는 이 대통령의 대일 외교 ‘투 트랙’ 기조에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지난달 참의원 선거 패배 이후 이시바의 총리직 유지 여부가 불투명한 정치적 상황에서 ‘과거 직시’와 관련해 진전된 발언을 내놓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대통령실이 이날 공개한 한·일 정상회담 결과 공동언론발표문에 따르면 이시바 일본 총리는 이날 회담에서 “1998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밝혔다.
1998년 공동선언을 통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입장을 계승하되, 역대 총리들이 밝힌 과거사 관련 언급들도 함께 계승한다는 것이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별도로 거론한 것 자체에 의미를 둘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 대통령이 밝혀온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자”의 ‘과거 직시’ 부분에 대한 나름의 답이라는 것이다. 다만 언론에 공개된 양국 정상의 발표 현장에서 이시바 총리는 이 같은 문구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앞서 이시바 총리는 지난 15일 패전 80년 전몰자 추도식에서 “전쟁의 참화를 결단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그 전쟁의 반성과 교훈을 이제 다시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이후 13년 만에 나온 현직 일본 총리의 ‘반성’ 표현을 두고,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 내에서는 이시바 총리의 과거사 관련 발언 수위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이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에서 “한편으로는 너무 가깝다 보니 불필요한 갈등도 가끔 발생한다”면서 “(한·일 사이에) 도저히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숙고하되, 협력할 분야는 협력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 정치권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날 공동발표문을 보면 과거사와 같은 갈등 사안은 ‘현상 유지’ 수준으로 관리하겠다는 데에 양국 정상이 뜻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민감한 사안은 현 상태로 동결해 둔 채 새로운 분야를 찾아 교류·협력을 늘림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자는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나 일본산 수산물 수입 문제 등이 공동발표문에 등장하지 않은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지난 21일 보도된 일본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해 “국가로서 약속이므로 뒤집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날 공개된 일본 언론들과의 서면 인터뷰에서도 같은 문제에 대해 똑같은 인식을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