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서씨의 중흥조모 고성 이씨

안동에 살던 이고(李股)의 무남독녀 고성 이씨는 선비 서해(徐嶰)와 혼인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퇴계도 인정한 전도유망한 서해는 갓 돌이 지난 아이와 아내를 남기고 23세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아내 이씨는 친정과 시집의 부모들이 모두 세상을 뜬 데다 주변에는 의지할 형제도 없는, 그야말로 사고무친이었다. 이에 이씨는 생전의 부친이 물려준 재산을 정리하여 세 살난 아들을 안고 서울 길에 오른다. 다행히 서울 약현(藥峴)에는 아이의 중부(仲父) 서엄(徐崦)이 살고 있어 그 이웃에 모자의 거처를 마련했다. 퇴계의 문인이었던 중부의 배려 속에서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위한 이씨의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씨는 시각 장애인이었다. 장애의 정도를 말해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시력이 약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23세에 홀로 된 후 외동 안고 상경
명주 ‘약산춘’ 만들어 집안 일으켜
아들 약봉 서성, 가문의 중흥조 돼
정조도 눈여겨본 명문가의 출발점
자손 번창 바라며 집 크게 짓기도
후손 가운데 문과 급제자만 123명
세 살배기 아이 안고 서울 정착

한편 23세의 홀어머니 품에 안겨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온 세 살배기 아이는 나중에 달성 서씨 중흥조가 되는데, 바로 약봉 서성(徐渻, 1558~1631)이다. 조선후기 인재의 산실이었던 달성 서씨 가문은 ‘서지약봉(徐之藥峯)’이라는 말처럼 사실상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약봉의 후손들은 10세손에 이르도록 고관대작이 즐비했고, 학술로는 새로운 사조를 도입하여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도했다. 서성의 아들 서경주(徐景霌)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고, 5세(世) 손녀는 왕비(영조비 정성왕후)가 되었다. 서명응, 서호수, 서유구 등은 과학과 실학을 가학(家學)으로 삼아 ‘조선 400년 최초의 거작(巨作)’을 제출하는데, 학자 군주 정조는 그들에게 보내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손자 서유구가 조부 서명응의 저술을 정리하여 『보만재총서』를 편집한 것이다. 또 자신의 저술 『임원경제지』에 조부와 부친의 주요 저작을 소개해 넣는데, 가문 내에서 학문의 사승(師承)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회마다 시대마다 성공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조선시대는 후손의 번창과 영달을 최고로 쳤다. 그런 점에서 ‘최고 인재의 산실’이 된 서성의 가문은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했다. 심지어 국왕 정조도 부러워했으니. 정조의 본명은 이산(李祘)이다. 왕은 자신의 이름으로 성(渻)을 잠시 사용한 적이 있는데, 자손이 번성한 서성(徐渻)의 이름을 딴 것이다. 잠시 사용했지만 이후 임금의 이름을 피한다는 뜻으로 ‘성(渻)’자를 다른 문헌에 쓰지 않았다고 한다. 서성이라는 인물이 18세기 조선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면 약봉 서성이 달성 서씨 중흥조로 등극하기까지, 아니 그 전에 재능과 덕성을 겸비한 한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자.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역사에는 보이는 영역이 있고 보이지 않은 영역이 있는데, 둘을 함께 보아야 전체상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백조의 우아한 자태는 물밑의 치열한 발질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과 같은 논리다. 특히 어린 약봉이 처했던 가족 환경을 고려할 때 그의 ‘성공’을 도운 보이지 않은 큰 힘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시선은 어머니 고성 이씨로 향했다.
아들 교육 위해 약주 사업에 전력
앞서 언급한 바 이씨의 시각 장애가 어느 정도인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는데, 그래야 그녀의 행적과 업적이 구체성을 띨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재조명은 사후 300년이 지난 일제 치하에서 일어나는데, 조선의 혼, 조선의 명인을 찾아 다양한 분야의 여성들을 발굴하는 지식인 운동의 일환이었다. 여기서 고성 이씨는 장애를 딛고 술을 빚어 판매하고 부자가 된 여성 사업가로 호명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처한 고난과 역경의 과정을 강조하다 보니 신체적 조건 또한 과도하게 서술된 점이 있다. 『한국야담사화집』에는 이씨의 이야기가 ‘맹과부이씨(盲寡婦李氏)’라는 표제로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이씨는 대여섯살 때 여종의 부주의로 약물이 눈에 들어가 시각을 잃었고, 그의 아버지 청풍군수 이고(李股)는 용모와 자질이 아름다운 딸을 훌륭한 선비와 맺어주기 위해 퇴계에게 하소연한다. 아버지는 말한다. “내 딸은 하늘이 점지한 여중 군자다. 아름다운 재모와 덕성을 갖춘 내 딸이 저렇게 된 것(눈이 먼 것)은 필시 하늘이 명예와 복록을 더욱 빛나게 하시려는 뜻이다. 덕 있는 가정으로 들어가 가문을 창대히 하고 좋은 자손을 내게 하려고 험한 것을 가미하신 것이다.” 이고의 딸 이씨가 퇴계의 제자 서해(1537~59)와 혼인한 사실을 소재로 이야기가 꾸려졌다. 이씨의 실명 시점이 5~6세 때라는 것과 딸의 자질이 출중한 까닭에 장애에도 불구하고 사윗감으로 훌륭한 선비를 찾았다는 아버지 이고에 대한 이야기가 주목된다. 그런데 이씨의 아들 서성이 ‘어머니가 완전한 실명(失明)에 이른 것은 46세 때’라고 한 것을 보면 시력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약시든, 실명이든 이씨는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도 자신의 기량을 최고조로 구현한 것이다.

그러면 이씨는 어린 아들을 반듯한 인물로 길러내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 이씨의 8세손이자 약봉의 7세손인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전국의 명주(名酒)를 소개하는데, 약산춘(藥山春)을 이렇게 설명한다. “충숙공(서성)의 집에서 제조한 술로, 공(公)의 집이 약현에 있어 약산춘이라 이름 붙였다.” 즉 고성이씨가 빚은 술 이름이 약주(藥酒) 또는 약산춘인데, 뛰어난 맛으로 회자되며 상품으로 유통된 것이다. 우리가 쓰는 약주가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약현은 지금의 중림동으로 만리동 입구에서 충정로 3가로 넘어가는 고개로 종약산(種藥山, 15세기), 약전현(藥田峴), 약현(藥峴)으로 불리었다.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서성을 가리켜 ‘자태가 귀해 보인다’든가 ‘부잣집 아들’이라고 한 것은 어머니의 약주 사업이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맛을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긴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보냈을까. 그녀에게 약주 사업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이기보다 아들의 교육과 훗날 찾아올 후손들의 든든한 배경을 만들자는 목적이었다. 『약봉유고』에 의하면, 이씨가 새집을 건축하며 그 규모를 크게 벌이자 주변에서 모자뿐인 단출한 가족인데 고대광실이 웬 말이냐고 하지만, 이씨는 늘어날 후손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무남독녀인 자신과 외동인 아들의 처지에서 후손의 번창을 소망한 것이다. 그런 이씨의 원대한 구상은 아들과 손자 대에서 구체화하였다. 연민과 배려의 대상이던 미약한 모자에게 내로라하는 집안이 인척으로 들어오고 심지어 왕이 사돈을 맺자 하기에 이르렀으니, 모자가 상경한 지 35년이 흘렀다.
조선사회는 과거 급제를 하여 고급관료가 되고 고관대작이 되는 등의 성취들이 가문의 격을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아들 약봉의 후손에서 문과급제자 123명이 나오는데, 약봉의 장남 서경우가 1603년에 급제한 시점에서 1894년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약 300년 동안의 일이다. 이 숫자는 본손(本孫)만 계산된 것으로, 외손은 이보다 몇 배가 더 많고, 무과 급제자와 순수 학자까지 포함하면 인재의 산실이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그런데 약봉의 인물됨을 묘사한 여러 공사(公私) 기록을 보면, 그 어머니의 자식 교육이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겸손과 공손, 그리고 올바름이었다. 서성은 왕이 자신의 아들 경주를 부마로 낙점하려 하자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불가함을 아뢴다. 사족(士族)이 되긴 했지만 가난하고 미천한 집안이라는 점, 아비와 백부는 나이 20여 세에 세상을 뜨는 등 5대조 이하 60세 이상을 넘긴 사람이 없는 단명 집안이라는 점, 어미는 46세 때에 두 눈이 완전히 멀어서 아무것도 분간 못 할 지경이 되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말한다. “저는 분수를 지키며 감히 분수 밖의 소망을 품지 않았습니다.”(광해조일기1) 서성은 각 도의 관찰사와 판서 등의 주요 직책에 있으면서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 청탁하는 일이 없었고, 다른 사람의 사사로운 부탁을 들어준 적도 없었다.”(‘서성신도비명’)

시력을 완전히 잃은 이씨, 그 후 30여년은 자신의 꿈과 노력이 결실을 보는 시간이었다. 고성 이씨(1539~1615)는 아들 약봉의 유배지 단양에서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친정에서 건너온 소호헌(蘇湖軒, 친정집)의 유산에, 사업으로 직접 키운 재력은 후손들이 뜻을 펼치는 기반이 되었다. 약봉의 후손들에게 고성 이씨는 집안을 일으킨 중흥조모(中興祖母)이다. 장애를 가진 작은 여인이 꿈과 노력으로 얼마나 큰 역사를 만들 수 있는지를 고성 이씨는 보여주고 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