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밑천도 희망도 꺼멓게 탔니더”

2025-03-30

참담했다. 잿더미로 변해 주저앉은 집과 각종 창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꺼멓게 타버린 농기계…. 화마가 덮친 마을과 농경지는 전부 폐허로 변해 있었다. 22일 경북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야산에서 시작된 산불이 25일 오후 순간 최대 풍속 20m 강풍을 타고 불과 3∼4시간 만에 경북 북동부로 대확산하면서다.

“아무것도 없니더. 입고 있는 옷이 전부시더. 집도 없고, 종자도, 농자재도, 농기계도 밑천이 하나도 없는데 인제 우에 사니껴.”

27일 오전 경북 안동시 임하면 고곡리 자연부락 양지마을에서 만난 김승환씨(65)는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안동초등학교에서 임시 대피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이날 부인과 함께 하릴없이 잿더미로 변한 집 주위를 서성였다.

김씨가 살던 양지마을 가옥 8채 중 6채가 25일 오후 의성발 산불 대확산 때 완전히 불탔다. 새까맣게 변해버린 장독과 장독대를 보고서 집이 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은 마치 폭격을 맞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는 “집은 말할 것도 없고, 저온창고와 고추건조기, 올해 농사지을 콩·참깨·들깨 종자, 먹을 양식까지 모조리 타버렸고 사과원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 사뒀던 어린 묘목 150그루(300만원어치)는 심지도 못하고 모두 탔다”면서 “남은 건 몸에 걸친 옷이 전부”라고 말했다.

25일 오후 5시께 불길은 강풍을 타고 불기둥으로 변해 인근 길안면 용계리를 집어삼켰다. 돌풍 형태로 변한 불기둥은 하천을 타고 좌우에 있는 주택 30여채와 과일 저온창고 3개동을 모두 태웠다. 신일용씨(58)는 “창고에는 사과 80t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재앙이다”라며 앙상한 뼈대만 남은 창고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용계리를 거쳐 청송군 파천면으로 이어지는 914번 도로 양쪽엔 곳곳에 불탄 집과 비닐하우스가 보였다.

영양군 석보면 화매2리도 산불의 상처가 깊었다. 마을 전체 90가구(빈집 포함) 중 80%가 전소됐다. 이재민 30여명이 머무는 오래된 경로당은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씻지도 못했다.

25일 오후 5시50분께 차를 타고 급하게 대피하다 화염과 연기에 갇혀 3시간을 버티다 겨우 살아난 한호기씨(68)는 “목숨은 건졌지만 남은 게 하나도 없다”면서 “105구짜리 트레이 200개 분량의 고추모종과 농사 밑천인 모종을 키우는 비닐하우스는 모조리 타버려 눈앞이 캄캄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3만3051㎡(1만평) 규모로 고추·배추 농사를 짓는 김경환씨(60)는 집과 함께 창고가 전소됐다. 올 농사를 위해 미리 사뒀던 비료·농약·비닐 등 각종 농기구가 몽땅 잿더미로 변했다. 고추와 배추모종을 기르는 비닐하우스는 물론 안에 있는 스프링클러, 전열기도 모두 타버렸다. 그는 “그 난리통에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산불 진화와 인명 보호, 임시 대피소 운영 등으로 농업분야의 피해 집계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피해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보인다.

오원인 화매2리 이장은 “좁은 경로당에 이재민 40여명이 급한 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온수 시설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한다”면서 “당장 온수보일러가 있어야 하고, 산불 연무로 숨쉬기조차 어려워 공기청정기도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마을은 고추와 준고랭지배추가 주작물인데 올해 농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모두 잿더미로 변했고, 더 큰 문제는 각종 농업용 시설과 농기계가 모조리 불타버렸다”면서 “삶의 터전과 생업의 발판을 몽땅 잃어버린 이웃들이 하루빨리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라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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