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사회’는 퇴화한다

2025-01-09

진화생물학에서 받아들여지는 ‘동종(同種)교배 퇴화의 법칙’이 있다. 비슷한 형질의 생물끼리 교배하면 열성(劣性) 유전자가 발현되면서 열등한 개체들이 태어나고 결국 그 집단은 퇴화한다는 이론이다. 반대로 이질적인 형질 간의 교배를 통해 태어나는 잡종은 부모의 강점을 이어받아 우수한 개체가 될 확률이 높아서 집단의 번성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 등이 주장한 열린 사회(Open Society)는 진리의 독점을 거부하고 다양한 의견과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이다. ‘열린 사회’는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하고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하기 때문에,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닫힌 사회’에 비해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생물학적으로 동종교배는 퇴화

변화 거부 닫힌 사회도 마찬가지

한국정치 생태계 닫혀 발전 지체

신인 유입으로 개방성 확 늘려야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를 보면서 “한국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일갈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말이 떠오른다. 1995년 베이징에서 한 발언이니 이미 30년이나 지났는데, 그동안 기업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세계 1류로 인정받는 기업도 나왔지만 한국 정치는 발전은커녕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다. 거대 야당의 입법 독주와 이에 대항하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무한 반복되고, 무차별적인 탄핵 소추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그 후에도 정치권은 이전투구를 계속해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도대체 어디가 밑바닥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같은 한국 사람들이 하는 일인데 왜 기업의 실력과 정치의 수준은 이렇게 차이가 날까. 필자가 보기에 그 중요한 이유는 해당 조직이 얼마나 열려있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된다.

한국의 기업은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기 때문에 외부 변화에 민감하고 매우 개방적이다. 전형적인 ‘열린 조직’이다. 반면 정치는 내국인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 폐쇄적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선거제도 등으로 인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제도권으로 진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표적인 ‘닫힌 사회’가 되었다. 소위 ‘그들만의 리그’가 된 것이다. 그들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입법권을 행사할 때에도 종종 공공의 이익보다 본인의 이해관계를 우선한다. 한 예로 그동안 수많은 정치학자와 평론가들이 우리나라 정치를 선진화하기 위해서는 권력구조와 선거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왔지만, 권력을 가진 측에서는 항상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승자독식 구조가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결국 폐쇄적인 정치 현실에서는 진정한 변화가 난망(難望)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나라의 정치 생태계를 개방적으로 만들어 진정한 개혁이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정치의 특성상 글로벌 경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신 국내 여론의 힘으로 변화를 압박할 수 있겠으나, 과거의 경험을 보면 그 효과도 제한적이다. 특히 최근 팬덤 정치가 극성을 부리면서 중도의 합리적인 의견보다 극단적 지지층이 힘을 받는 구조가 되어 여론의 영향력은 더욱 약해지고 있다. 결국 남는 것은 내부로부터의 변화이다. 즉 건전한 정치 신인들의 자유로운 유입을 통해 개방적인 정치 풍토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거대 양당의 지배력이 강하고 당 지도부가 공천권을 쥐고 있어서 정치 신인들의 유입이 어렵다. 물론 선거 때가 되면 당마다 몇몇 새 얼굴을 영입하기는 하나, 대부분 타 분야의 명망가를 당 지도부가 섭외하는 경우라서 진정한 밑으로부터의 정치신인 충원은 아니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공천이 제도화된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참신한 신인이 정치 경험을 착실히 쌓아 지도자로 성장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우리나라의 정치 생태계도 이처럼 좀 더 열린 사회에 가까워져야만 진정한 정치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정치 집단 말고도 글로벌 경쟁에 직접 노출되지 않는 ‘닫힌 조직’이 많이 있다. 법조인과 의사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활동 영역은 주로 국내이고, 국가가 인정하는 면허제도 때문에 외국인의 진입도 어렵다. 이처럼 닫힌 조직은 직역(職域)이기주의에 빠지기 쉽다. 의사협회가 비대면 진료에 반대하는 것이나 변호사협회가 AI(인공지능) 법률서비스 도입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 한 예이다. 4차산업혁명 시대의 대표적인 혁신 사업들이 이들의 반대로 국내에서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매우 불행한 일이다. 과거에는 대학교수 사회도 ‘자기들만의 리그’라고 비판받았으나 요즘은 외부 평가가 활성화되고 연구 업적의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지면서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의 정도에 따라 분야별 차이가 있고, 전체적으로는 아직도 미흡하다.

‘닫힌 사회’의 장본인인 정치인, 법조인, 의사, 교수 등은 모두 우리 사회에서 대우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열린 생태계를 만들어야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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