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원소의 나라, 동탁의 나라

2025-04-25

농경 국가인 동양 사회의 역사에는 주기가 있다. 대체로 500년의 태평성세가 지나면 왕조의 피로와 백성의 지루함이 겹쳐 왕실이 쇠약해지고 천하의 호걸들이 쟁패하는데 그 기간은 대략 100년이 걸린다, 동한(前漢)과 서한(後漢)의 450년이 지난 서기 200년경의 중국이 바로 그러했다. 아직 유비·조조·손권이 정족(鼎足)을 이루지 못한 이 시대에는 원소(?~207)와 동탁(?~192)이 패권을 다투었다.

원소는 하남성 여남의 명문거족의 후손이었다. 조상 가운데 승상에 오른 사람이 세 명이었고, 원소 자신도 공부가 깊었다. 그가 발해 태수를 거쳐 대장군에 오르니 권력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았고 따르는 사람도 많았고 물자도 넉넉했다. 조조·유비·손책을 부하로 거느렸고, 그에게는 옥새(玉璽)가 있었으니 천자의 꿈을 품을 만도 했다. 뒷날 많은 인물이 그의 곁을 떠났지만, 마지막까지 명장 안량·문추와 심배·전풍·저수와 같은 책사와 충신이 그를 보필했다.

원소는 천자 참칭하려는 국사범

동탁은 행실에 허물이 많은 잡범

둘 다 통치자로 적합하지 않아

백성은 현군 출현을 더 기다려야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귀가 여렸다. 이는 정치인으로서 가장 위험한 자질이다. 그것으로 원소의 정치 생명은 끝났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머뭇거렸고, 충신들의 건의를 받고 결심을 한 뒤에도 내당에 들어가 후실 유씨를 만나고 나면 말이 달라졌다. 이럴 때 간신들이 파리떼처럼 들끓기 마련이다. 역사에는 충신이 간신을 이긴 사례가 드물다. 그러면 누가 간신을 제거하는가? 간신은 자기 스스로 몸을 망치거나 주군의 손에 죽지, 충신의 손에 죽지 않는다.

이런 역사를 보며 사마천(司馬遷)은 “도대체 천명이란 옳은가, 그른가?”(天道是也非也)라고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했지만, 역사는 그리 선량하지 않았다. 개미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걸어간 사람이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악인이 벌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끝까지 원소에 충성하며 나라를 걱정한 심배나 전풍 또는 저수가 원통하게 죽는 것을 보노라면 모종강(毛宗崗)의 말처럼, “저 하늘의 뜻은 백성이 바라는 바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백성이 불평한다고 해서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동탁은 서장(西藏)의 강인(羌人) 출신이었다. 이들은 정확히 말해서 한족(漢族)이 아니라 중동인에 가깝다. 마초와 안록산(安祿山)이 모두 그곳 출신이다. 서장인이라고 다 그렇기야 하랴만, 이곳 사람들은 강인하며 냉혹하다. 그는 강골의 몸을 자산으로 무반에 뛰어들어 능력을 인정받아 하동(산서성) 태수에 올랐다. 무인으로서 지모도 조금은 갖추었지만, 황건적의 소탕에서 큰 공로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런데 관료의 생명은 연줄이다. 그런 점에서 동탁이 포악한 국구(國舅) 하진(河進)을 만난 것이 그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동탁은 하진에게서 정치의 잔혹함을 배웠으나 무한한 욕심을 절제하는 법을 깨닫지 못했다.

“낙양성을 바라보며 천하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대장부가 아니다”(蘇秦)라지만, 동탁이 저지른 지난날의 허물로 볼 때 그가 천자를 꿈꾸는 것은 다소 허황했다. 장군은 술과 여자의 유혹을 받기 쉽다(B. Tuchman, 『8월의 포성』). 정치인은 행실이 단정해야 한다. 야심과 집념, 위기에서 살아남는 동물적 후각, 그리고 주변과 동지에 대한 잔혹함으로 미루어보면 그가 천자를 꿈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있느니 없느니 해도, 그것은 천명이 아니었다. 광야를 질주하며 모질게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한다면 동탁이 멈춰야 할 곳에서 멈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좀더 고민했어야 한다.

동탁은 지모와 책략에 출중하고 속이야 어떻든 죽을 듯이 충성하는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를 신뢰했지만, 두 사람은 자객이나 모사(謀士)로는 능력 있는 사람일 수는 있으나 천하 대사를 함께 도모할 재목은 아니었다. 그가 천자를 폐위할 무렵이 되면 옥새가 손에 잡힐 듯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양아들인 여포가 방천화극을 들고 눈을 부라리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가까운 사람과 척(隻)을 많이 진 사람은 권좌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돌아보면 원소든 동탁이든 둘 다 백성이 바라던 주군은 아니었다. 행실에 허물이 많은 동탁은 잡범이었고, 옥새를 잡고 천자를 참칭하려던 원소는 국사범이었다. 잡범 밑에 사는 백성들은 치욕을 느꼈고, 국사범 밑에 사는 사람은 나라를 걱정했다. 통치자로서 누가 더 바람직하지 않았는가를 판단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더 쉽게 선악을 판단해 버리겠지만. 그러나 잡범은 시대 정신이 아니었으며, 국사범은 국운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성들은 유비와 같은 현군이 나타나기까지 2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무렵이면 전국 시절 100년의 8부 능선에서 백성들만 허덕이고 있었다.

“역사란 수레바퀴”(A. J. Toynbee)라느니, “대화”(E. H. Carr)라느니 하지만 내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역사란 길(way)”이더라. 때로는 지나간 길을 되돌아보고 때로는 가야 할 길을 바라보고 때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연히 길 위에 서서 서성거린다. “그러나 그러한 무리도 또한 모두 사라지리라.”(So perish also all others, 『오디세이아』)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