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막부의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 대해 자주 쓰게 된다. 그에 대한 사료를 읽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요즘 워낙 정국이 어수선하다 보니 대정봉환(大政奉還)-왕정복고(王政復古) 쿠데타로 이어진 정치 위기와 그 극복의 과정이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해서다.
1867년 11월9일 요시노부는 교토에 있던 각 번(藩)의 중신들을 니조성(二條城)으로 불러 모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이래 약 270년간 행사해온 대권을 천황에게 돌려준다고 선언했다(대정봉환). 페리의 위협 아래 단행된 개항(1854)으로 촉발된 정정불안은 이미 극에 달했고, 막부는 수습 능력이 없어 보였다. 여론은 막부의 용단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자는 드문 법, 실현될 거라 기대하는 자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쇼군 요시노부가 정권이양을 전격 발표한 것이다. 여론은 환호했고, 정적이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은 당황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튿날 천황에 제출한 대정봉환 상표문(上表文)에 막부정치의 잘못에 대한 사과가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정치가 마땅함을 잃은 점이 적지 않아 금일의 형세에 이른 것은 필경 박덕(薄德)의 소치이니 부끄러움을 견디기 어렵습니다.”(유인선 외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정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니, 한껏 생색을 내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최고 권력자의 파격적인 행동에 정국의 풍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이 천황 밑에 신정부(의정소·議政所)를 세워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대결단을 내린 요시노부도 거기에 참여하는 구상에 동의했다. 궁지에 몰린 사쓰마는 결국 쿠데타라는 무리수를 강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1868·1·3). 그러나 이미 요시노부가 정권을 반환한다고 한 마당에 새삼 쿠데타를 벌였으니 명분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사쓰마는 지지세를 얻고자 막부를 제외한 광범한 정치세력을 신정권에 끌어들였다. 그중에는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정치적 영단을 내린 그를 신정부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쓰마로서는 당혹스러운 사태 전개였다.
쿠데타를 당하고도 요시노부는 공순근신(恭順勤愼)의 태도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사쓰마의 도발에 격앙한 병사들에게도 경거망동 말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쿠데타 사흘 만에 충돌을 피해 오사카로 내려갔다. 그가 30세를 갓 넘긴 젊은이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이런 상황을 본 민심은 점점 요시노부로 기울고 시간이 갈수록 사쓰마는 조정에서도 소수파로 몰렸다. 요시노부의 재상경과 정부 참여는 시간문제인 듯했다. 그가 노린 게 이런 거였다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가 탄복한 대로 과연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재림’이라 할 만했다.
위기에 빠진 사쓰마가 목 빠지게 기다린 게 있다. 바로 막부 측의 ‘경거망동’, 즉 군사도발이었다. 그것만이 요시노부의 사과를 무위로 돌리고 그를 조적(朝敵·조정의 적)으로 몰 수 있을 것이었다. 친막부 강경파 아이즈번(會津藩)이 그 덫에 걸려들었다. 1868년 1월27일 강경파들이 요시노부 재상경의 선발대로 교토 쪽으로 가다 사쓰마·조슈군과 충돌하고 말았다. 사쓰마·조슈군은 천황의 깃발인 금기(錦旗)를 내걸고 있었다. 영락없이 조적이 된 것이다. 이를 본 요시노부는 증기선을 타고 에도(江戶)로 내려갔다. 천지분간 못하고 전투를 도발했던 강경파들도 요시노부를 따라 꽁무니 빠지게 사라졌다. 무책임의 극치였다. 여론의 허를 찌르는 지도자의 대담한 양보와 사과는, 대개 그에게 큰 정치적 이익을 가져다준다. 다만 큰 용기를 필요로 할 뿐이다. 강경파라는 그럴듯한 외피를 쓴 철부지들은 대개 목소리만 클 뿐 사태 파악을 못한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는 책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