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숙 “철언이 공 잊지 마요”…노태우 ‘6공 황태자’의 탄생

2025-03-05

노태우 비사

제1부. 잘못 끼워진 6공 첫 단추

4회. 노태우 처가사랑과 황태자 박철언의 탄생

“우리는 노 대표를 후계자로 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대신 노 대표는 한 가지만 다짐해 줘야 한다.”

1987년 초 시내 모처에 모인 5공 실세들이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불러 다짐을 받고자 했다. 노태우가 “뭐든지 말해 보라”고 하자 모임의 좌장이자 노태우의 절친 정호용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이 된 후 친인척 문제를 확실히 관리하겠다는 약속을 해 달라.”

당시 참석자는 정호용(육사 11기) 외에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육사 14기), 안무혁 국세청장(육사 14기), 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육사17기) 등 군 출신 5공 핵심들이었다. 이들은 실제로 이후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 역할을 해냈다.

정호용은 내무장관과 국방장관을 거치면서 내각과 군부를 관리했다. 이춘구는 선거대책본부장과 취임준비위원장으로 당을 맡았다. 안무혁은 안기부장이 돼 정국을 총괄했다. 김용갑은 청와대 수석으로 전두환 대통령 주변의 노태우 비토를 저지하는데 한몫했다.

이들이 연초부터 밀실에 모인 것은 나름의 책임의식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신군부 권력의 공동창업자’라 자부했다. ‘정권 재창출도 함께 책임져야 할 공동운명체’라는 생각에 싸여 있었다. 이들은 노태우 도착 직전까지 전두환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의 비리를 성토하던 참이었다.

두 가지 면에서 노태우는 전두환보다 친인척 문제에 취약했다.

첫째, 노태우의 성격이다. 전두환처럼 확고한 리더십도 친인척 문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노태우는 성격이 미적지근한데 친인척들은 성격이 강했다.

둘째, 전두환의 경우 친인척 비리가 대개 이권개입 수준이라며, 노태우의 경우 국정개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처남 김복동은 육사 11기 출신으로 정치참여는 물론 대권 꿈을 품고 있던 인물. 동서 금진호는 상공부 장관까지 지낸 엘리트 관료 출신. 처조카 박철언은 안기부장 특보이자 노태우의 핵심 참모로 이미 매사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런 주변의 우려를 잘 알기에 노태우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약속한다. 내가 그 약속을 안 지키면 내 목에 칼을 들이대도 좋다.” 참석자들이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친인척 중 김복동(처남)과 금진호(동서), 박철언(처사촌)을 철저히 관리해 달라. 나머지는 우리가 나서서라도 막겠다.”

전두환 못지않은 노태우의 처가 사랑

전두환의 처가사랑은 유별난 것으로 잘 알려졌다. 장인 이규동은 전두환이 육사 생도 시절 육사 교수부장으로 일찌감치 전두환을 후원해 주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전두환은 장군집 사위가 됐다.

노태우 역시 과분한 집으로 장가 갔다. 노태우는 대구 변두리 가난한 집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처가는 대구의 유복한 집안이었다. 장인이 일제시대부터 공직생활을 해 대구 시내에 집이 있었다. 이 집안의 3남 김복동이 육사 11기 하나회 창립멤버였다. 노태우는 김복동의 집을 제 집처럼 들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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