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은 특유의 장광설로 가득한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최후진술에서 “전시·사변에 못지않은 국가 위기 상황”이라 12·3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주장했다. 야당의 방위사업법 개정 추진, 국방예산 삭감, 검사·감사원장 등 줄탄핵 시도를 근거로 들었다. 입법, 예산안 처리, 공직자 탄핵은 입법부 고유 권한이다. 윤석열 주장대로라면 모든 여소야대는 망국적 위기 상황이고, 계엄은 일상이 될 것이다. 윤석열이 국가적으로 비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는 뜻이다.
12·3 내란이 발생하고 석 달 넘게 지났지만 이 돌연한 난행의 심층 동기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혹자는 ‘명태균 게이트’가 방아쇠가 되었으리라 추측한다. 그러나 이 가설은 명씨 사건이 불거지기 6~7개월 전부터 윤석열이 비상대권을 입에 올린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한 가지 전제할 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은 아닐지언정 윤석열 나름으로는 모종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그게 아니라면 비상계엄은 미치광이 권력자의 순수한 난동이고, 그 동기를 밝히는 건 정치학이 아니라 심리학의 몫이 될 것이다.
검찰의 윤석열 공소장과 탄핵심판 최후진술에 단서가 있다. 윤석열은 지난해 3월 말~4월 초 전 국방부 장관 김용현 등에게 ‘비상대권을 통해 헤쳐나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처음 말했다. 총선이 목전이었고 런종섭 파동, 황장무 회칼 발언, 윤석열 대파 발언 파문 등으로 여당의 패색이 짙은 때였다.
당시 여당 상황도 복기할 필요가 있다. 당을 이끌던 한동훈은 윤석열과 결별한 상태였다. 나름의 대중적 지분을 가지고 윤석열과 긴장관계를 형성한 첫 여당 대표였다. 윤석열로서는 국회는 물론 당까지 잃을 수 있는 정치적 위기였고, 이를 일거에 해결하는 수단으로 비상대권을 떠올렸을 수 있다. 윤석열이 작년 8월부터 한동훈을 조치 대상으로 언급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윤석열은 지난해 11월24일 김용현 등과 차를 마시다 야당의 판검사 탄핵 가능성, 감사원장에 대한 탄핵 추진 등을 성토하며 비상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상계엄 이틀 전에는 김용현을 불러 ‘어느 나라 국회에서 헌법기관인 감사원장을 탄핵해서 재판대에 세우냐’ ‘특정인을 수사하는 검사 3명을 탄핵하는 것도 말이 되느냐’며 ‘국가비상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윤석열은 탄핵심판 최후진술에서도 같은 이유를 들어 “망국적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했다.
이 정부에서 검찰·감사원이 무엇이었나 떠올릴 필요가 있다. 두 기관은 정권 보위의 전위대였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검찰 통치는 안팎의 위기에 직면했다. 하나는 김건희 수사를 둘러싼 윤석열 사단 내부의 균열이요, 다른 하나는 검사 탄핵을 통한 야당의 검찰 통제 시도였다. 감사원도 비슷했다. 내부에선 전 정권 때 임명된 감사위원들이 감사원의 통치수단 역할에 비토를 놓았고, 야당은 최재해 감사원장을 탄핵하며 견제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윤석열은 애당초 정치라는 걸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정치를 대신한 게 검찰·감사원·방통위를 통한 강압적 통치였다. 이 기관들을 앞세워 야당과 전 정권을 두들기고 언론을 옥죄었다. 여당은 바람잡이, 치어리더였다. 그런데 이 통치수단들이 뜻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국회는 국회대로 거대 야당이 장악했으니, 윤석열 입장에선 심대한 통치의 위기였다고 할 만하다. 통치기구의 위기가 곧 통치의 위기인 셈이다.
이럴 때 가능한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를 복원해 야당 협조를 구하려 애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3의 통치수단을 강구하는 것이다. 윤석열이 택한 건 후자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해 군대를 동원했다. 즉흥적·우발적 결정이 아니었다. 수개월의 의식화·조직화를 거친 나름 치밀한 거사였다. 윤석열 공소장에는 그가 ‘비상대권이 필요하다’며 수개월에 걸쳐 김용현 등을 가스라이팅하는 과정이 제법 상세하게 담겨 있다.
이런 가설로 보면 술에 절고 무속에 심취한 어리석은 윤석열과는 사뭇 다른 인물의 모습이 그려진다. 권력의지는 충만하나 정치를 할 생각은 없는 독선적 통치자의 일그러진 초상이 떠오른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부정선거 음모론이나 시대착오적 색깔론도 나치 법학자 칼 슈미트의 정치론처럼 적과 동지를 갈라치려 발명해낸 맹신에 가깝다고 본다. 12·3 내란은 아둔한 폭군의 비이성적 난동이 아니라 그릇된 정치이성의 소산이었다. 그래서 더욱 위험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