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심(不動心).” 자신의 장점을 묻는 질문에 아직 앳된 모습의 19세 남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 하나를 꺼냈다. 찰나의 순간 희비가 엇갈리고 관중들의 뜨거운 함성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종목 특성상 베테랑 선수들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10대 선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온함을 잃지 않는 것을 장점으로 자신 있게 꼽았다. “욕심을 가지고 경기를 하다 보면 하고 싶었던 플레이도 되지 않고 몸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요. 그럴 땐 더욱 마음을 다잡고 관중들에게 편안한 경기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요.” 한국 남자 피겨의 기대주 김현겸(19·한광고) 이야기다.
김현겸은 종목 특성상 어린 나이에 주목 받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늦게 빛을 봤다. 일곱 살에 처음 피겨 스케이트를 신은 그는 차분히 기량을 성장시켰다. 조바심이 날 법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결코 급하지 않았다. 평소 모든 일에 느긋하고 긍정적인 성격 덕이다. 그는 “처음에는 빙상장에 나가서 스케이트를 미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기복이 있는 성격이 아니라 해마다 조금씩 좋아지는 게 느껴져 더 즐겁게 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천히 기량을 성장시킨 그는 2022~2023시즌 트리플 악셀, 2023~2024시즌 쿼드러플 토루프를 연달아 장착하며 단숨에 국내 톱클래스 선수로 발돋움했다.
김현겸이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건 2024 강원 동계 청소년올림픽이었다. 당시 그는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69.28점으로 3위에 그치고도 프리스케이팅에서 147.45점을 얻어 금메달을 따냈다. 김현겸은 “쇼트에서 큰 실수를 해 오히려 프리에서는 마음이 편했다. ‘실수만 없이 타자’라는 마음으로 편하게 나섰는데 그 마음 때문에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현겸의 우상은 남자 피겨 최고의 스타 차준환(24·고려대)이다. 차준환은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선수 최고 순위인 5위를 차지하며 김연아(35·은퇴) 이후 한국 피겨계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포스트 차준환’이라고 불리는 김현겸도 그의 뒤를 따라 다가오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등 큰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목표다. “정말 좋아하는 선배의 뒤를 잇는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그는 “그런 선배가 개척해놓은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게 행운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막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그는 우상 차준환과 함께 오는 7일부터 열리는 2025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남자 싱글 종목에 출전한다. 그동안 아시안게임 피겨에서는 여자가 금메달 1개(2017년 최다빈)와 동메달 1개(2011년 곽민정)를 따냈지만 남자는 단 하나의 메달도 챙기지 못했다. 김현겸은 차준환과 함께 이번 대회에서 피겨 남자 싱글 ‘최초 메달’이라는 기록에 도전한다. 그는 “(최초 메달에 대해) 큰 욕심을 내고 있지 않다. 그래도 항상 의지가 되는 (차)준환 형과 함께 나가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며 자신감을 숨기지는 못했다.
김현겸은 이번 대회 목표에 대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차분한 연기를 펼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성적은 팬들이 느끼는 연기에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한 뒤 “어떠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김현겸만의 연기를 펼쳐 팬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피겨 대표팀은 9일 ‘결전지’ 중국 하얼빈으로 출국한다. 남자 피겨 싱글은 11일 쇼트프로그램과 13일 프리스케이팅을 치러 메달의 주인공을 가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