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한 명장이었으나 부패한 권력 앞에 한없이 무력

2025-10-09

국가 원로의 책무 방기한 최영 장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한국 사람 중에 이 말을 모르는 이는 없다. 최영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있던 말이다. 1379년(우왕 5년) 최영이 왜구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홍산파진도(鴻山破陣圖)’가 완성되자 왕이 이색에게 찬양하는 글을 지으라고 명했다. 그때 이색이 “선고(先考·돌아가신 아버지)의 ‘황금 보기를 흙덩이처럼 하라’는 유훈을 마음속에 새겨 청백한 지조가 늙을수록 더 굳어졌다”라고 했다. 오랜 세월 전해지는 과정에서 토괴(土塊·흙덩이)가 돌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색 말고도 동시대 사람들의 최영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이 강(剛), 직(直), 충(忠), 청(淸) 네 글자로 압축된다. 굳세고, 곧고, 충성스럽고, 청렴하다는 말이니,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게다가 장수로서도 더없이 유능했다. 이색의 같은 글에 따르면 최영은 크고 작은 87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이 충성을 다했던 고려 왕조가 망해가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87전 87승, 타고난 장수였으나

이인임의 권력 장악 도와 출셋길

재판 개입, 매관매직 판치는데도

“이 늙은이가 어쩌겠나” 한숨만

우왕의 명령에도 이인임 살려줘

요동 출병 오판, 왕조의 멸망 재촉

화살 맞고도 전투 멈추지 않아

최영은 타고난 군인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체격이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용맹스러웠다.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나 맨 앞에서 돌진했고, 화살을 맞거나 창에 찔려도 싸움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61세 나이로 홍산에서 왜구를 격퇴할 때 앞장서서 싸우던 중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입술을 맞아 피가 낭자했지만 태연하게 뽑아버리고 계속 싸웠다는 일화가 있다. 마침 용맹스러운 군인, 유능한 장수가 필요할 때였다. 왜구의 노략질이 빈번했고, 공민왕의 반원(反元) 정치가 단행되면서 원과 군사적으로 충돌하게 되었으며, 홍건적의 두 차례 침략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이밖에 공민왕이 시해당할 뻔한 흥왕사의 변란, 공민왕을 폐위하려는 덕흥군의 침입,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반란, 그리고 우왕대(1375~1388) 왜구의 대규모 침략에 이르기까지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외적을 격퇴하고 내란을 진압하는 현장에는 언제나 최영이 있었다.

전란은 최영에게 기회였다. 36세 늦깎이로 궁궐 문을 지키는 군인에서 출발해서 수많은 승리를 거둔 끝에 60세 되던 해 세 번째 고위직인 판삼사사가 되었고, 66세에는 한 등급 더 올라 수시중이 되었다.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위상도 탄탄했다. 당시 고려는 원의 간섭 아래서 붕괴된 군사력을 급히 복구하기 위해 한 사람의 원수(元帥)가 한 도(道)의 군사 징발과 지휘를 도맡아 책임지도록 했는데, 그러다 보니 각도의 군사들이 원수의 사병처럼 부려지는 일이 벌어졌다. 최영은 인구에 비례해서 군사가 가장 많았던 양광도(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차지함으로써 강력한 군사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또 왜구의 규모가 커지면서 여러 도의 군대를 동시에 동원할 필요가 생겼는데, 그때 연합 부대의 지휘관으로 실력이나 명성에서 최영만 한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최영은 60대에 인생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시대와 불화하는 점이 있었다.

1374년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고려 역사를 뒤바꾼 대사건이었다. 이 일로 여러 사람의 운명이 달라졌거니와 최영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후계자를 둘러싼 논란 끝에 이인임이 우왕을 세우고 권력을 잡았다. 이인임은 공민왕의 개혁 정치로 숨이 넘어가고 있던 수구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공민왕 개혁의 성과를 신속하게 무효화했고,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강화해 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관직에서 쫓겨났는데, 개혁의 성과를 뒤집는 데 반발하는 신흥사대부를 축출한 것이 시작이었다. 1375년 정도전을 비롯해서 20명의 신흥사대부가 한꺼번에 유배되었고, 그 가운데 전녹생·박상충 두 사람이 고문 후유증으로 유배 도중에 죽었다. 1377년에는 신흥사대부를 축출할 때 한편에 섰던 지윤과 반목해서 무리 20여 명과 함께 처형했고, 1379년에는 역시 전날의 동지로서 권력을 나누어 가졌던 양백연을 죽이고 17명을 효수하거나 쫓아냈다. 국왕마저 무시하는 이인임의 전횡을 우왕의 유모가 나서서 막으려 하자 왕을 협박해서 궁궐에서 내쫓게 했다. 1381년, 권력을 잡은 지 7년 만에 이인임은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절대 권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인임 권력 장악의 조력자

최영은 이인임의 충실한 조력자였다. 우왕 초에 지윤과 함께 신흥사대부를 국문했고, 특히 전녹생과 박상충을 참혹하게 고문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바로 최영이었다. 지윤과 양백연을 제거할 때는 최영이 큰 역할을 했다. 이 두 사람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무장이었으므로 문신인 이인임이 쉽게 상대할 수 없었지만, 그런 약점을 최영이 군사력을 가지고 메꾸어주었다. 유모 장씨를 내쫓을 때는 우왕이 최영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왕명을 거역하고 이인임 편에 섰다. 1381년, 최영이 66세에 수시중에 오른 것은 그에 대한 보상이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법, 이 점에서는 이인임도 예외가 아니었다. 권력을 잡자 관리 인사를 마음대로 쥐락펴락했다. 친인척이나 자기 사람을 요직에 앉히고,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관직을 나누어 주었다. 더 많은 관직을 팔기 위해 관리 정원을 늘렸으며, 뇌물이 충분히 쌓일 때까지 인사 발표를 늦추는 일도 있었다. 재판에도 개입해서 소송을 다투는 사람은 반드시 이인임에게 뇌물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인임의 첩도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았다. 심복인 임견미·염흥방이 이인자·삼인자가 되어 권세를 부렸으며, 심지어 권력자의 노비들도 위세등등해서, 수청목(水靑木·물푸레나무)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다른 사람의 땅을 마구 빼앗았으므로 토지문서에 우선하는 ‘수청목 공문(公文)’이란 말이 생겼다. 국가의 요직은 모두 이인임의 친인척이 장악하고, 관직은 뇌물 바치고 아첨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이·임·염 세 사람의 농장이 전국 각지에 퍼져 있었으니 국가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이인임 집권기 14년 동안 민심이 고려 왕조를 버렸다.

최영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관직은 이인임 바로 아래였고 군사도 가장 많이 거느리고 있었지만, 최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인임이 권력을 잡는 데 일조했을 뿐, 그의 권력이 부패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아니, 막지 않았다고 해야 옳다. 단 한 번도 이인임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성취한 홍산대첩의 논공행상에서도 아무런 공 없이 이인임에게 뇌물 주고 상 받는 사람이 있었지만 막지 않았다. 주위에서 왜 가만있느냐고 물으면 “정권을 잡은 사람이 자기 이익만 좇고 악행을 쌓아 스스로 패망을 재촉하고 있으니, 이 늙은이가 어쩌겠는가”라며 한숨짓는 게 전부였다. 이때도 여전히 청렴했지만, 자신의 청렴이 주위로 퍼지게 하지는 못했고, 권력의 부패도 막지 못했다.

원로의 실패, 국가의 비극

이인임의 권세는 우왕에 의해 끝이 났다. 1388년 우왕이 최영과 이성계에게 이·임·염 세 사람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최영이 왕명을 따라 이인임 세력을 일망타진했고, 며칠 새에 임견미·염흥방을 비롯한 고위 관료 70여 명과 그들의 노비 1000명을 처형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최영은 이인임을 두둔해서 죽음에 이르지 않게 했다. 이인임과의 개인적 친분 때문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정직한 최공이 사사로이 늙은 도적을 살려 주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인임을 제거한 뒤 최영의 시대가 열리는 듯했지만, 몇 달 뒤 이성계에 의해 축출되고 곧 목숨을 잃었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요동 출병은 최고 권력자로서 최영의 능력 부족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고려 왕조는 더 이상 지탱할 힘을 잃고 말았다.

최영이 청렴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인임 정권의 절대 부패 속에서 그만은 독야청청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최영은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와 높은 관직, 87전 87승에 빛나는 전공, 충·청·강·직하다는 평판이 합쳐져 국가의 원로로 인정받고 존경받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위상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 일을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대신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게 되었고, 그 때문에 고려가 망했다. ‘원로’ 최영의 실패는 지금도 타산지석이 될 만하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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