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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만큼 질곡의 한국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건물은 없을 것이다.
태조 3년인 1395년에 주례 고공기를 기본으로 세운 경복궁의 정문으로 ‘나라의 위엄과 왕의 덕이 널리 빛난다’라는 현판의 뜻과 달리 오욕과 상처투성이의 과거다. 1592년 임진왜란때 궁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한 선조에 분노한 백성들이 경복궁을 방화 약탈했으며 광화문도 소실 되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에 이르러서야 중건되고 일제때 해체되어 지금의 민속박물관쪽으로 이전되고 그 앞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위치된다.
6.25때 폭격소실, 1968년 철근콘크리트 복원, 중앙청(총독부청사) 철거 후 2010년 원래 위치에 원형복원 된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을 두고 중앙에서 정남쪽으로 뻗어나가는 육조거리, 좌측으로 교차되는 시전은 오늘날도 그 골격이 그대로 남아서 명실상부한 한국의 역사와 행정,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유대한민국이 건국된 곳이며 경제발전의 피땀어린 역사가 뒷골목 해장국집에도 박혀있는 곳이다. 1975년 국회의 여의도 이전, 1995년 법원의 서초동 단지, 2022년 용산 대통령실 시대가 열리면서 핵심 권부가 광화문을 떠났지만 대한민국의 중심은 여전히 광화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편리한 접근성, 문화시설과 대규모 집회가 가능한 광장은 12.3계엄 이후 대통령탄핵 찬반 집회가 매일 개최되고 있다. 근대적 시위, 집회의 시작은 만민공동회 시국 집회로 볼 수 있겠다.
아관파천 1년 만에 경운궁 환궁 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근대적 흐름을 따르지 않고 황제권만 강화하고 세계정세에 무지하여 러시아에 의존하는 실정을 계속하였다.
국익이 열강에 침탈되고 부정부패가 더 심해지자 근대 기독교사상에 눈을 뜬 독립협회가 주도적으로 이끈 만민공동회의 집회는 자주독립유지, 민권확대, 부정부패 척결, 의회설립을 주장하는 근대적 민주주의 운동의 시초로 평가된다. 이에 왕권 약화와 기득권 상실 위기감을 느낀 고종과 수구파는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주요 인사를 체포 구금한다.
훗날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승만도 이때 투옥된다. 만민공동회 주최 연설에서 백정출신인 박성춘은 신분철폐와 사회개혁을 외쳤고 그의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 제1회 출신으로 외과의사, 교수, 독립운동가로 삶을 살았다.
헌법재판소는 경복궁 동쪽 북촌에 있어서 넓게 보면 광화문으로 볼 수 있다.
헌법재판소가 치과계에 낯설지 않은 이유는 2015년에 통과된 1인1개소법(의료법 제33조 제8항)의 위헌 헌법소원 제기에 대항하여 재판소 앞에서 1428일 동안 1인 시위를 계속했으며 국민의 건강권보호, 의료환경 개선을 위한 법의 취지가 합헌으로 판결되었다.
비급여공개제도는 국민의 의료선택권, 비급여 비용 경쟁을 통한 국민의료비 부담 완화 목적이 합헌 판결되어 치과개원가에 초저가 덤핑 치과의 전국적 출현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25년 겨울, 광장의 매서운 추위를 참아가며 대통령 탄핵 찬반 집회를 여는 군중들은 저마다 애국을 외치며 상대방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다.
그러는 사이 세계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자외교, 양자외교 가릴 것 없이 동분서주하고 있고 과학기술 발전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한국은 마치 쇄국의 조선말처럼 눈 귀 닫고 발목이 묶여서 뒤처지고 있으니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넘어 두려움을 느낀다.
대한민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리더는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들은 한강의 기적 DNA를 일깨우고 젊은 세대가 제2의 이병철, 정주영을 꿈꾸게 해야 한다. 한국의 량원펑이 되고 싶은 젊은 세대가 기업, 대학에서 밤잠을 아껴가며 연구 개발하고 그들이 영웅이 되어야 한다.
광화문은 말없이 외친다. 자유 대한민국이여 다시 한 번 뛰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