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공기가 종이라고, 자신의 몸이 펜이라고 생각하고 각자의 이름을 표현해보는 거예요.”, “자신이 좋아하는 ‘바람’을 떠올리고 표현해보는 거예요. 서로의 빈 자리를 채워가면서 무대를 공유하면 그게 ‘우리들의 바람’이라는 하나의 춤 공연이 되는 겁니다.”
지난 1월 18일 오후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한 연습실, ‘탈가정 청년들의 심리·정서적 안정을 돕는 예술기반 사회적 처방 워크숍’ 현장. 여섯 명의 청년이 정은주 안무가의 설명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 각자의 이름을, 그다음엔 바람과 별을 몸으로 그려냈다. 부는 듯 안 부는 듯한 바람, 덮쳐오는 바람, 호수에 비친 별, 나타나는 별…. 각자가 떠올린 바람과 별을 제각각의 몸으로 표현하면 다른 참여자들이 어떤 바람, 어떤 별인지 맞혀가며 서로의 동작을 따라 익혔다. 마지막에는 6개의 바람, 6개의 별이 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장면을 연출했다.
“바람이라는 단어 하나를 모두 다르게 생각하는 게 재밌었어요. 단어로 표현하는 것보다 몸짓으로 표현하는 게 오히려 정확할 만큼 감정 이상의 의미를 표현할 수 있어서 신기했어요.”, “유치원 발레 발표회 때 이후로 춤을 춰본 게 처음인 것 같아요. 내가 몸을 이렇게 움직일 수 있구나, 새로웠어요. 집 안에서 많이 답답했는데 여기서 털어내고 가고 싶어요.”
참여자들의 워크숍 후기는 ‘나도 몰랐던 내 몸의 움직임이 신기하다’였다. 정은주 안무가는 “보통 누구나 자기 생각을 몸으로 표현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데, 오늘 워크숍은 춤에 대한 벽을 깨뜨리기 위한 활동이었다”며 “자기 안의 반짝이는 것들을 끌어낼 수 있는 게 춤이고, 춤은 감정을 발산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춤을 추면서 감정을 발산할 때의 감각은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탈가정 청년’은 누구
이 워크숍은 사회적기업 ‘282북스’가 탈가정 청년들의 심리적 안정과 자립 의지를 높이기 위해 기획했다. ‘탈가정 청년’이라는 용어는 아직 생소하다. 정부·지자체는 자립준비청년, 가족돌봄청년, 고립은둔청년 등 ‘위기 청년’을 지원하는 정책·조례에 행정적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탈가정 청년은 학술적·행정적 개념이 체계화돼 있지 않다. 2020년 서울시 청년청 연구용역으로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이 수행한 ‘청년정책 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탈가정 청년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탈가정 청년은 “가정폭력, 가정불화, 성폭력, 아웃팅, 파산 등으로 인한 탈가정 경험이 있거나 이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청년, 혹은 희망하는 청년”이다. 282북스는 탈가정 청년을 ‘가정 내 폭력, 방임, 경제적 착취, 학대 등의 이유로 원가정과의 물리적, 경제적, 정서적 단절을 선언한 청년’으로 정의해 함께하고 있다. 요약하면 탈가족 청년은 원가족(부모)과의 끈을 끊어낸 이들이다.
사회 진입기에 원가족의 경제적·심리적 지지·지원 없이 자립해야 한다는 점에서 탈가정 청년도 위기 청년에 속한다. 하지만 이들은 복지제도 및 청년정책의 사각지대에 있다.
A씨(29)는 가정폭력 피해자로 고등학교 때 집에서 나왔다. 갈 곳이 없어 노숙도 하고 무작정 종교시설 찾아가 잠을 청하기도 했다. 최근 1년간 몸을 다쳐서 쉰 것 빼고는 9년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살기 위해서 다단계 영업장을 스스로 찾아갈 정도”로 어려웠던 시기도 있었다. A씨는 기초생활보장제 수급자 신청을 하려 했지만 동주민센터에선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부모와 절연한 상태인데, 다시 연락하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가정불화로 부모와 연락을 끊은 B씨(20대)도 “탈가정 청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주거 지원인데, 청년주택을 신청하려고 해도 부모 소득을 따지니까. (청년 지원책) 어떤 것도 신청할 수가 없더라”라고 했다. 부모의 종교 문제, 또 통제폭력·비인간적 양육태도에 시달리다 탈가정한 C씨(20대)는 “탈가정을 하면 높은 확률로 최빈층으로 떨어지는데, 사실상 구제받을 방법이 전혀 없다”고 했다.
현행법상 가족관계등록부를 수정·삭제할 방법은 없다. 가족 중심, 가구 기준의 행정·복지체계는 이들의 자립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삶을 더 힘들게 하기도 했다. D씨(35)는 “만약 이사를 해서 전입신고를 하면 가족이 행정적으로 내 주거지를 파악해서 찾아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며 “가족의 주소지 열람을 막는 절차가 있지만 직접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해 어떤 친구들은 전입신고를 하지 않고 살기도 한다. 학대 피해자가 학대 가해자를 피해 숨어다녀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가정폭력 피해를 입증하면 가족관계등록부 열람 금지 신청을 통해 집 주소 등 정보 접근을 못 하게 할 수 있지만 피해를 증명하기 쉽지 않고, 원가족이 친구나 친척 등을 통해 수소문해서 찾아오기도 한다.
한국에서 청년세대 누구나 자립이 어렵다. 특히 탈가정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원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것’, ‘원가족과 연락하지 않는 것’과 다른 차원에서 발현된다. 청소년기까지 원가정에서 겪은 정신·신체적 피해를 복구하면서, 경제적·정서적 자립 기반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탈가정 청년’이란 이름을 설명하려면
탈가정 청년들은 인생 경로를 정하면서 의지하거나 의논할 존재가 없다는 것이 힘든 부분이라고 했다. 또 ‘탈가정 청년’이라는 자신의 상황을 타인에게 이해받기 어려워 고립감을 호소한다. 심리적 어려움을 해소할 방법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약간 부끄러움 같은 게 있잖아요. 친구들에게는 ‘부모님이 시골 살아서 서울에서 자취한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혼자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아플 때 제일 서럽잖아요. 아플 때 연락할 사람이 없다 보니까, 그런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A씨)
“곧 설 명절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명절 때 어디 가요?’ 이런 질문을 아주 당연하게 하잖아요. 가족 중심적으로 생각하니까 당연히 명절에 가족한테 가겠지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저의 탈가정 배경을 설명해야 하고, 또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듣는 사람은 결국은 ‘그래도 가족한테 한 번 연락해봐’ 이렇게 말하거든요. 저는 가족을 끊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말이죠.”(D씨)
이들은 힘이 안 나서 심리상담을 받았는데 “힘을 내세요”라고 피드백을 받았을 때, “그래도 언젠가 부모를 만날 날이 올 거예요”라는 말을 무심히 던지거나 “아무리 미워도 부모잖아요”라고 훈계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벽 앞에 선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탈가정 이유를 말하면 그게 약점이 되기도 하고, 가족주의에 기반한 말들로 2차·3차 가해를 당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죠. 사람이 살면서 가족한테 사랑받고 싶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고, 연결되고 싶고, 소속되고 싶은 욕구들이 있잖아요. 탈가정 청년들은 그런 기본적인 욕구를 참아야 해요. 인간으로서의 관성과 본성을 거스르면서 살아야 하니까 다른 청년들과는 아예 경쟁이 안 되는 거예요.”(C씨)
■탈가정 청년들이 ‘함께한다’는 것
강미선 282북스 대표는 “282북스가 2021년 자살생존자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당시 탈가정 청년들의 상황을 알게 돼 2022년부터 예술기반 심리·정서 지원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며 “이 친구들이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부분을 깨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이 워크숍은 지난 1월 11일 시작해 오는 2월 22일까지 총 10회 진행한다. 정은주 안무가와 이동주 배우가 지도한다. 워크숍을 통해 수집된 탈가정 청년의 이야기는 오는 2월 22~23일 서울 선릉역 인근 무스 스튜디오에서 퍼포먼스 연극으로 무대에 오른다. 강 대표는 “워크숍의 첫 번째 목표는 심리·정서 안정을 돕는 것이고 워크숍을 통해 건강한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는 게 두 번째 목표”라고 했다. 워크숍 이후에 당사자들이 주인공이 돼 무대 공연을 올리는 이유는 “탈가정 청년들이 겪은 고충을 직접적으로 말했을 때 듣는 이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어서 예술의 형식으로 전달해서 사회적 인식도 확장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현재 탈가정 청년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한 규모는 알기 어렵다.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어떤 정책과 제도가 필요할까. 강 대표는 “탈가정 청년들이 발굴된 계기는 이들이 기존 정책·복지제도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라며 “물리적·경제적으로 부모와 단절을 했지만 행정적으로 부모와 엮인 부분, 그게 가장 맹점”이라고 했다. 그는 “우선은 이들이 행정적으로 안전하게 자립할 방법, 건강하게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워크숍에 참여한 당사자들은 탈가정 청년들이 모일 커뮤니티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A씨는 “오늘 워크숍처럼 또래들과 공동으로 뭔가 해본 적이 없었다”며 “몸도 움직이고 또래와 같이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도 있어서 약간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수도권으로 취업한 후 홀로 지내며 몇 년간 은둔생활을 했다는 E씨(30대)는 “저는 이 상황에 대해 아주 무덤덤해졌는데 한 번 크게 아팠을 때는 정말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한 적이 있다”며 “서로 잘 모르지만 이런 워크숍처럼 만나서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나이대에 해야 하는 것들이 분명 있는데, 저희는 그냥 지나쳐요. 탈가정 청년인 나를 설명하기 위한 투쟁을 하다 보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요. 그래서 가장 도움이 되는 건 경제적 지원일 것이고 심리적 도움도 필요하죠.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2>에서 기쁨의 기억은 노란색 구슬이고, 불안 기억 구슬은 주황색인데 저희는 노란색보다는 주황색이 많아요. 워크숍이나 다른 활동을 하면서 탈가정 청년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정책이나 인식적으로 변화가 있어서 우리에게도 노란색 구슬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C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