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나온 판소리

2025-01-30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대한민국에서 그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어떤 ‘구라’ 고수가 말하길, 황석영 앞에서는 자기도 한풀 꺾인다고 한다. 나는 20대 젊은 시절에 황석영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70대가 되어 그의 민담 시리즈를 네 살배기 손주에게 사준 것이 엊그제다. 손주에게 읽어 주었더니, 손주가 듣고 나서 “이것보다 할아버지 이야기가 더 재밌어요” 한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죽으면 못 보니까 둘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그 아이가 찍은, 죽으면 다시 못 볼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개화기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황석영의 소설 《여울물 소리》에서 판소리 명인이 제자에게 이렇게 썰한다.

“평조(平調)가 소리의 기본이니라. 한밤중에 달이 중천 하늘에 높이 떠 있는 것처럼, 또는 한들 바람이 잔잔한 수면을 스쳐 가듯이 맑고도 시원한 소리다. 우조(羽調)는 맑고 격하고 장하고 거세며 엄한 가락이니라. 사납게 들어올리기 때문에 맑고 장하고 격동하여 한 말이나 되는 옥이 부딪혀서 깨어질 때 옥 부스러기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것과 같도다. 계면조(界面調)는 처절하고 슬픈 소리니 아득하게 멀고 숙연한 가락이다. (…) 그리고 여향(餘響, 남아있는 형기)이 있으니 들보 위의 티끌이 떨리고 흘러가는 흰 구름을 멈추게 하는 가락이다. 새벽의 먼 산사에서 마지막 타종 소리가 끊길 때와 같도다. 이는 다만 소리꾼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득음과 더불어 터득해야 할 것이요 누가 누구를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이 글에 빠졌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이것은 구라인가 아닌가. 구라의 경계는 어디인가. 빅뱅은 구라인가 아닌가.

만일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구라인가 아닌가.

“명창이 되려면 먼저 뼛골과 오장육부가 사무쳐야 하고 그다음 득음이라는 걸 해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처럼 깊고 웅장한 가락, 이처럼 슬픔과 환희가 절묘하게 섞인 소리가 어디 또 있으랴. 판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한탄하지 말자. 광장과 거리에 나가 보라. 수수만 명이 판소리를 합창하고 있다. 한들 바람이 잔잔한 수면을 스쳐 가는 듯한 소리, 격하고 장하고 거세며 엄한 가락, 한 말이나 되는 옥이 부딪혀서 깨어질 때 나는 요란한 소리, 처절하고 슬픈 소리, 들보 위의 티끌이 떨리고 흘러가는 흰 구름을 멈추게 하는 소리, 산사 종소리가 끊길 때의 여운. 그 온갖 소리가 다 들리지 않는가. 여의도 광장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송현 광장에서 한남동 거리에서 그리고 우리 가슴팍 늑골 사이, 오목 가슴 앙가슴 속에서 소리 없이 울리고 있지 않는가.”

김선흥 작가

전직 외교관(외무고시 14회), 《1402강리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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