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40대 남성 A씨가 서울 마포대교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 앞에 섰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그는 죽고싶단 생각을 하며 이곳에 왔다고 했다. 전화를 든 A씨는 상담사에게 "신용불량이 된 뒤 노력했는데도 모든 게 망해버렸다. 부인에겐 이혼당했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 "제대로 된 회사는 들어갈 수도 없고, 일용직으로 버티지만 그마저도 점점 살기가 힘들다"고 호소했다.
그간 주춤하던 자살이 2023년에 이어 지난해 크게 뛴 배경엔 '경제 주축' 3050 남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10년래 가장 많은 3050 남성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자살 사망 급증세는 자영업 위기 같은 경기 급랭과 고(故) 이선균씨 등에 따른 베르테르 효과(유명인 죽음에 동조하고 이를 모방하는 경향)가 겹쳐진 여파로 풀이된다. 계엄·탄핵 발(發) '사회적 아노미'가 깊어진 올해도 자살 위기가 큰 만큼, 안타까운 죽음을 줄일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7일 통계청 등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 사망자 수는 1만4439명(잠정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8.3명이다. 둘 다 2년 연속 증가세다. 자살 사망자는 금융위기 여진이 이어졌던 2011년(1만5906명) 이후 13년 만에 최고다. 서명옥 국민의힘 의원이 보건복지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 고위험군 상담은 65만1040건으로 2020년보다 41.2% 뛰었다. 안 그래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1위인 자살률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특히 성·연령대별로 보면 남성 30대(15.7%), 40대(13.8%), 50대(11.9%)의 자살 사망자 수만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러한 3050 남성을 합치면 1년 전보다 13.4% 늘어난 5603명이다. 2019년 이후 다시 5000명대로 올라선 동시에, 2014년(5771명) 이후 10년 만에 가장 많은 규모다. 지난해 이례적으로 연초(1~4월), 연말(10~12월)에 자살 사망자가 몰린 것도 이들 영향이 컸다. 노인·여성 등의 자살이 줄어든 것과 대비된다.

불안한 경제 상황이 경제활동을 이끄는 3050 남성을 직격하는 '트리거'(방아쇠)가 됐다. 지난해 한국 경제는 고금리·고물가와 실질임금 하락, 소비 부진 등으로 날이 갈수록 내려앉았다. 지난해 4분기 성장률은 예상치(0.5%)를 대폭 밑도는 0.1%(전 분기 대비)에 그쳤다. 지난해 12월 취업자는 46개월 만에 감소 전환했다.
자영업은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다. 자영업자 수는 지난해 565만7000명으로 3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한국은행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말 자영업자의 저축은행·여신전문금융사 연체율은 각각 9년 반, 10년 반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그렇게 생계 전선에 뛰어든 가장들은 벼랑 끝에 내몰렸다. 지난해 1월~올해 3월 3050 남성들이 한강 교량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로 가장 많이 호소한 문제는 '경제 문제'(33.9%)였다. 9년치(2015~2023년) 심리부검을 담은 복지부 보고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장년층(35~49세) 자살 사망자는 피고용인·자영업자 비율이 높았다. 사망 전 스트레스를 준 사건은 정신건강 다음으로 '경제 관련'이 두드러졌다. 구체적으론 부채와 수입 감소가 많았는데, 부채는 주택 임차·구입이 주된 원인이었다.
이지영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사업추진본부장은 "이들의 경제적 스트레스와 사회적 고립이 자살 위험을 높이는 걸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지난해부터 '문 닫게 생겼다' '경기가 얼어붙었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호소하는 환자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2023년 12월 배우 이선균씨의 사망도 지난해 초부터 3050 남성을 흔들었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비슷한 또래에 서민적 이미지였던 이씨의 죽음에 청장년층 남성이 충격을 많이 받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베르테르 효과도 2~3개월 이상 오래가는 양상을 보였다. 정서적 완충 역할을 해줄 '가족'이란 울타리가 점차 허물어지는 것도 이들의 위기를 부채질한다.

올해, 위기는 계속된다. 탄핵 정국, 제주항공 참사, 배우 김새론씨 사망 등이 쌓이면서 전 사회적 분노가 커지고 있어서다. 지난 2월 김씨가 숨진 직후 서울 내 자살 관련 신고가 뚜렷한 증가세를 보였다. 올 1분기 성장률이 -0.2%를 찍으면서 경기 그늘도 한층 짙어졌다. 한국자살예방협회는 "자살 증가를 국가적 위기로 규정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백종우 교수는 "사회적 혼란기에 자살 느는데, 올해 대통령 탄핵으로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낸 데다 전 세계적인 경제 변화까지 닥쳤다"면서 "사회적 재난 속에 환자들도 못 견디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자살 위기가 커져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자살예방협회장)는 "사회가 점점 공격적으로 변하면서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자해하는 식이 됐다. 대선 정국에서 비방·공격만 이어지면 이런 경향이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살예방 정책은 선진국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서명옥 의원이 복지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자살예방·생명존중 관련 예산액은 약 562억원이다. 해마다 늘긴 하지만, 일본의 관련 예산 8300억원(2021년)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2020년 4530명이던 자살 고위험군 치료 연계 인원은 지난해 2213명으로 반 토막 났다. 복지부 관계자는 "자살 사망자 증가에 따라 작년 말부터 지자체와 함께 고위험군 관리 등을 강화하고 있다. 자살 유족 원스톱 서비스를 점차 확대하고, 자살예방 보도준칙 보급 등도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적극적인 예산 투자로 상담·진료에 소극적인 3050 남성 등을 '양지'로 끌어올리고, 영향력이 큰 유명인에 대한 '사회적 타살'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강명수 한국자살유족협회장은 "장년 남성은 자조 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대면 상담 등의 자리가 늘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진표 교수는 "자살 예방을 위해서라도 연예인 등이 잘못하면 가혹하게 징벌하고 비난하는 사회 문화부터 바뀌어야 한다. 기존 정책의 틀을 바꿔 생명존중 가치관을 국민과 같이 체화할 수 있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