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상징

2025-01-21

세밑과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곳 포르투갈에서도 한반도에 관한 보도가 심심치 않게 자주 등장한다. 지난해 12월3일 실패한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로 말미암은 남한의 정정불안, 제주항공의 대형참사,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에 파병된 북한군에 대한 소식이 주종을 이룬다. 파리를 시작으로 하는 K팝 여성그룹 ‘키스 오브 라이프’가 유럽 순회공연의 하나로 리스본에서도 3월 말 무대에 선다는 기사도 있다. 계엄령이 포고된 후 긴장감이 한 달여 지속하는 가운데 현직 대통령이 체포에 이어 구속되었다는 소식은 한반도 관련 뉴스의 정점을 찍었다.

뉴스 사진에는 여러 색깔의 많은 깃발과 탄핵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플래카드와 함께 K팝의 경쾌한 노래에 따라 주로 젊은이들이 흔드는 응원봉의 흐르는 불빛도 보였다. 이와 대치하고 있는 다른 편에는 주로 노년층이 모여 체포의 위기에 처한 윤석열을 지키자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배경으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모습과 며칠 전 지지자들의 법원 난입 장면도 보인다.

트럼프처럼 붉은색 캡을 쓰거나 머플러를 두르고 붉은 응원봉을 흔드는 이들을 보면서 질문 하나를 떠올렸다. 붉은색은 주로 사회당이나 공산당 등 좌파계열을 곧 연상하게 마련인데 걸핏하면 ‘빨갱이’라는 말을 거의 입에 달고 살면서도 붉은색으로 온몸을 감싼 이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고 있는 한국의 시위문화를 유럽에서 과연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유럽에서는 주로 보수 세력이 즐겨 사용하는 파란색을 선택한 민주당에 대하여 보수 세력은 붉은색을 자기들의 정치적 상징(象徵)으로 선택했다. 유럽에서도 중세 때는 귀족이나 상류층은 원래 붉은색을 자신을 드러내는 색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발흥하는 시민계급에 밀린 이들은 루이 14세가 신었던 붉은색 굽이 달린 구두를 신은 것으로 자신들을 시민 계급과 구별하는 표징으로 삼았다. 프랑스 혁명시기 공화파의 상징으로 즐겨 썼던 자코뱅의 붉은 베레모(帽)를 거치면서 1830년경부터 붉은색은 유럽의 거의 모든 민중 해방운동과 혁명투쟁의 상징적 색상이 되었다.

정치상징은 정체성과 감정 전달

정치에서 상징이 없다면 책에 제목이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정치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오는 2월23일에 있을 연방의회선거에서 유권자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현재의 ‘신호등 연정’에 참여한 사회민주당, 녹색당, 자유민주당은 각각 붉은색, 녹색, 노란색을 당의 색깔로 삼고 있다. 각 당의 색깔을 보고 이들의 정치노선과 역사적 배경을 연상하게 되며 앞으로 있을 연정 구성의 색깔 조합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색깔은 아니었지만, 전통적으로 가톨릭에 기반을 둔 보수정당의 색상은 주로 검은색이다. 이는 16세기와 17세기에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던 영국과 네덜란드 중심의 개신교 국가들이 스페인이 중남미에서 보인 잔인한 행위를 고발한 ‘검은 전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와 달리 미국의 민주당을 파란색으로, 공화당을 붉은색으로 상징하는 것은 주로 언론이 두 당을 구별하는 방식이었지만 정치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 선거철이 되면 당의 이합집산에 따라서 당을 상징하는 색깔도 자주 변하지만 유럽의 정당사에서는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물론 세대교체에 따른 정당의 이념과 정강의 수정도 불가피하지만 오랜 역사에 따른 정당의 정체성 문제가 항상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문화적 감성의 차이도 큰 역할을 하는데 검은색을 일반적으로 피하는 한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정치적 상징으로서 검은색의 역사는 상당히 깊다. 중세의 귀족이 종교적인 경건함을 상징한 검은 의상을 즐겨 입었던 것처럼 무솔리니가 이끈 파시스트들도 집단으로 검은 셔츠를 입고 1922년 10월 로마로 행진했던 사실은 검은색이 상징하는 정치적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정치에서 상징은 정치적 정체성과 이에 관한 감정과 정서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문화적 매체다. 상징의 이런 본질을 깊이 분석한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1874~1945)는 <상징형식의 철학>에서 인간은 항상 상징이 있어야 하는 생명체로서 이를 통해서만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택할 방향을 정립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어떤 개념이나 사물을 대표하는 표시를 뜻하는 상징에 해당하는 그리스 어원에서 유래하는 ‘심벌론’(Symbolon)은 합친다거나 일치한다는 뜻이다. 심벌론의 반대말은 가른다거나 불화(不和)를 뜻하는 ‘디아볼로스’(Diabolos)다. 끼리끼리만 만나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을 의미하는 상징은 따라서 자기편에 속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타자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악마화한다.

권력 구성에 대한 발상 전환 절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최근 경험하고 있다.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대규모 탄핵 찬반 집회와 이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적어도 헌재의 탄핵 인용 여부가 나올 때까지는 지속할 것처럼 보인다. 이와 더불어 오는 대선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정치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고착화할 것이다.

유튜브와 같은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 온갖 가짜뉴스는 정치적 상징의 힘을 빌려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흑백의 단순한 논리로 쉽게 변환시킨다.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이냐, 아니면 모든 빛을 반사하는 흰색이냐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빨리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흑백만으로 구성된, 단색의 그림을 의미하는 ‘모노크롬’(Monochrom)의 세계와도 비슷하다. 러시아 태생 카지미르 말레비치(1879~1935)의 ‘검은 사각형’(1915)은 다양한 색채가 주는 복잡함 대신에 기하학적인 형태나 구도가 전하는 단순성과 순수성을 강조했다. 일상적인 세계가 갖는 복잡한 구조나 색채 대신에 어떤 절대적 감정 표현을 추구했던 모노크롬의 세계는 가령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8)가 자연과 인간의 실재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재현하려고 했던 사실주의적 그림처럼,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따랐다.

위에서 보았듯이 현실정치 속에 등장하는 상징의 다양한 색채가 단순히 흑백이라는 양자택일의 구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현실 정치의 복잡한 구조 때문이다. 사실 승자독식의 권력구조 때문에 얼마나 큰 비용을 지금 한국 사회는 지불하고 있는가.

이번 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모든 관심이 거의 탄핵 문제에 쏠리고 있지만 이런 사태를 불러온 요인으로 제왕적인 대통령 중심의 권력체제를 지적하고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의도 보인다. 탄핵 문제를 희석하려는 저의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있는 것 같다. 8년 만에 다시 경험하는 탄핵이라는 비정상적인 정치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인 권력구조에 대한 논의는 불가피하다고 본다.

헌법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현재와 같은 대통령 중심제는 위에서 언급한 모노크롬, 의원내각제는 사실주의 표현양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통령이 행정의 책임자로서 정치권력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조건은 흡사 모노크롬이 절대적인 감정의 표현에 집중하는 것과 유사하다.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의 민주적 통제의 어려움은 모노크롬이 단일한 색상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양한 색채가 주는 심미적 깊이를 제공하지 못하고,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엘리트 중심의 예술이라는 비판과도 일맥상통한다.

유럽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의원내각제는 유권자를 대표하는 의회의 다수당이 - 만약 한 정당이 의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 못할 때는 연정형식을 통해 - 행정부를 구성한다. 승자독식의 위험을 방지하고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는 점에서 사실주의적 예술에 비유할 수 있다. 정권 교체의 유연성은 높지만, 정당 간의 갈등이 정치의 불안정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독일의 대통령은 명목상의 국가 원수지만 포르투갈은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프랑스의 대통령은 이보다 훨씬 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탄핵 정국의 해결책 모색은 시급하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권력 구성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처럼 순수한 내각제, 또 내각제에 대통령의 권한을 추가한 포르투갈의 예도 참고할 필요는 있다. 물론 이 모든 모색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 안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두 말이 필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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