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확산하는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 농장간 수평전파가 의심되는 사례가 속출해 농가들이 불안에 떤다. 농가들은 정부가 달걀값 안정을 이유로 방역 관리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최근 전북 김제시 용지면 산란계농장 밀집단지 농가들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불안감은 지난해 12월23일 산란계 7만2000여마리를 사육 중인 A농장이 고병원성 AI로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시작됐다. 이 농장 기준 반경 500m 안에는 또 다른 산란계농장 4곳이 자리해 있다.
하지만 이들 농장에 대한 예방적 살처분은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고, 7일 후인 12월30일 직선거리로 290m 떨어진 B농장에서도 확진됐다. 1월4일엔 최초 발생농장과 360m 거리에 있는 C농장에서도 고병원성 AI가 나타났다. 한 농민은 “12월23일 최초 발생한 이후 역학관계가 있는 농장(역학농장)이 4곳이나 됐지만 예방적 살처분이 이뤄지지 않았고, 그마저도 B·C 농장은 농장주가 이상 증상을 발견하고 먼저 의심신고를 하면서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전했다.
본지가 확인한 결과 B·C농장은 정부가 공식 집계하는 확진건수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해당 농장이 밀집단지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추가로 확진되더라도 동일사례로 간주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방역당국이 예방적 살처분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따르면 가금농장에서 고병원성 AI가 발생하면 발생농가와 역학적으로 관련돼 있거나 주변에 위치한 농가는 예방적 살처분을 해야 한다. 농장간 수평전파를 막기 위한 조치다. 그런데 올 동절기를 앞두고 정부는 살처분 규정을 바꿨다.
농식품부가 지난해 9월 내놓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방역대책’엔 발생농장에서 500m 이내 위치한 농장이라도 위험도가 낮다면 살처분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위험도가 낮은 농장은 ▲육계·원종계·순계 농장 ▲방역기준 유형 중 ‘가’ 유형 산란계농장(산란종계 포함)이다.
이 가운데 방역기준 유형은 방역기준 준수 정도와 고병원성 AI 발생 횟수에 따라 구분되는데, ‘가’ 유형은 위험도가 가장 낮은 그룹이다. 이어 방역대책은 3000마리 미만의 소규모 산란계농장도 역학사항 등을 고려해 예방적 살처분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3000마리 이상은 방역 우수 농가일 때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용지면 역학농장 4곳 중 3곳은 이런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농가들의 주장이다. 또 다른 농민은 “사육규모가 2700마리가량인 비전업농가 한곳을 제외하고 3곳은 최초 농장 발생 이후 모두 예방적 살처분을 희망했다”면서 “하지만 예방적 살처분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 사이 사료·달걀 차량이 같은 도로를 공유하며 밀집단지를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급기야 역학농장 4곳 외에 최초 발생농장에서 780m 떨어진 농장에서 1월5일 고병원성 AI가 추가로 발생하는 등 수평전파 의심이 강하게 일고 있다”고 꼬집었다.
대한산란계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달걀값 급등을 우려해 방역에 소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농가들 사이에서 제기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병원성 AI가 가금농장에서 나온 후 인근에서 또다시 발생하면 방역대(반경 500m)를 후속 농장 중심으로 새롭게 정하도록 하는 등 관련 규정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촉구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달걀은 대표적인 국민 다소비 식품이기 때문에 산란계농장에 대한 예방적 살처분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은 사실” 이라고 말했다. 이어 “매년 고병원성 AI가 상시화되다시피 하면서 농가의 방역 의식이 높아졌다고 판단해 살처분 규정을 완화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김제의 산란계농장 밀집단지에 대해선 농장이 연접한 형태가 아닌 만큼 농가별 위험도에 따라 살처분 여부를 결정 중”이라고 말했다.
이유리·이미쁨 기자 glass@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