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의전쟁이야기] 실패할 뻔했던 노르망디 ‘연합작전’

2025-03-23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는 단순히 총력전 수행 능력의 우세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연합국이 서로 협력했기에 가능했던 성과였다. 특히 미·영 연합국의 전쟁 수행은 연합작전의 모범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인의 기질, 문화, 군사 교리 등에서 비롯된 갈등도 존재했으며,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으로 평가받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상륙작전은 실패할 가능성이 큰 최상급 난이도의 군사작전이다. 이에 연합군은 작전 계획서만 해도 130쪽에 달할 정도로 철저하게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1944년 6월6일, ‘디데이’에 1파 병력만으로 15만명이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노르망디의 여러 상륙지점 중 한가운데 위치한 오마하 해변에서 미군이 수렁에 빠지며 작전은 실패 직전까지 갔다. 주간 상륙으로 기습 효과는 없었고, 짧은 함포 사격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흐린 날씨와 절벽 지형으로 공군의 지원도 효과적이지 못했다. 결국 미군 병사들의 용기와 희생 덕분에 간신히 독일군 방어진지를 점령하며 작전은 가까스로 성공했다.

작전을 실패로 이끌 뻔한 짧은 함포 사격 이후의 주간 상륙은 연합군의 절충안이었다. 미군은 태평양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주간 장시간의 강력한 함포 사격 후 상륙을 선호했으며, 영국군은 야간 기습을 주장했다. 미군은 야간의 아군 피해를 우려했고, 영국군은 장시간 함포 사격이 기습 효과를 감소시킨다고 보았다. 결국 짧은 함포 사격 후 주간 상륙이 선택되었고, 부족한 화력은 공군이 실시간으로 보충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마하 해변에서 전장의 변수는 이를 무력화했다.

연합작전의 어려움은 단순한 교리 차이만이 아니었다. 미·영은 문화적 기질부터 달랐다. 절차와 계획을 중시하는 영국군과 유연성과 현장 판단을 중시하는 미군의 방식은 종종 충돌을 일으켰다. 여기에 각국의 고집 센 지휘관들이 갈등을 키웠다. 그럼에도 연합군은 이를 극복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시스템이었다. 전략적 차원에서는 각국 수뇌가 모이는 전중 회담과 미·영의 연합참모본부, 작전 차원에서는 단일화된 연합사령부가 조정 역할을 수행했다. 그 중심에는 정치·외교적 감각을 갖춘 아이젠하워가 있었다. 그는 군사적 천재는 아니었지만, 그의 리더십 없이는 연합작전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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