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세미남 나르키소스의 슬픔 뒤에 감춰진 경고
오랜 옛날 그리스에 나르키소스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강의 신 케피소스와 샘의 님프 리리오페 사이에서 난 아이로, 어머니 리리오페가 홍수에 휘말린 후에 태어났다고 하죠. 아들의 운명이 궁금했던 리리오페는 예언자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예언자는 “그가 자신을 알지 않으면(자기 모습을 보거나 하지 않으면) 오래 살 것이다”라고 했죠. 걱정한 리리오페는 다른 님프에게 부탁하여 나르키소스가 수면에 가까워질 때 자기 모습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매우 잘생겨 수많은 님프의 사랑을 받았지만, 오만했던 나르키소스는 그 누구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중에 에코라는 님프가 있었습니다. 에코 역시 나르키소스를 사랑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순 없었죠. 여신 헤라의 저주로 남의 말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고 말을 따라 하던 에코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 나르키소스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죽을지언정 네 것은 되지 않겠다”며 거부해요. 슬퍼하던 에코는 산에 틀어박혔고, 점차 모습이 사라져 목소리만 남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나르키소스의 운명도 좋지는 않았습니다. 에코의 슬픔을 본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그에게 벌을 내리기로 한 거죠. 어느 날 나르키소스가 물을 마시러 연못으로 향했을 때, 그는 연못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존재를 마주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빠져들어 수면에 다가갔지만, 그가 물에 손을 대면 이내 그 모습은 사라져버렸죠. 이에 놀라 손을 떼면, 다시금 그 모습이 드러나며 그를 매료했죠. 만질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는 존재에 사로잡힌 나르키소스는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연못에 머물렀어요. 결국 그는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고 맙니다. 그가 사라진 그 자리에 황금빛 중심과 은백색 꽃잎을 지닌 한 송이 꽃이 피었으니, 그것이 바로 유럽에서부터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봄을 알리는 꽃 중 하나로 사랑받는 수선화죠.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꽃을 피우는 수선화는 보통 3월 중순에서 4월 초순께 봄의 시작을 알리죠. 나르키소스가 연못을 들여다보듯 약간 고개를 숙인 듯이 피어오른 꽃은 때때로 슬픔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아직 추운 데도 일찍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 부활을 뜻하기도 해요. 특히 독일처럼 비교적 북쪽 지방에서는 3월 말에서 4월 중순에 찾아오는 부활절 전후 피는 이 꽃이 예수의 부활을 축복한다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수선화는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상서로운 꽃으로 사랑받습니다. 특히 설날(춘절) 즈음에 수선화가 피면 천지의 축복이 내려온다면서 기뻐했죠. 그뿐만 아닙니다. 수선화(水仙花)를 한자로 풀면 ‘물의 신선 꽃’이라는 뜻이죠. 고대 중국에선 물가에 피는 꽃이 신선의 세계와 연결된 것이라 믿었는데, 수선화는 그중에서도 맑고 깨끗한 모습과 약간 고개를 숙인 겸손한 품성을 지녔기에 ‘신선이 거니는 곳에 피는 꽃’이라고 여긴 것이죠. 전설에 따르면 어떤 연못가에 수선화가 피며 사람들이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신성한 기운이 감돌았는데, 그곳을 스쳐 지나가면 장수와 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남겼다는 “수선화는 영혼을 살리니, 빵 대신 수선화를 사라”라는 말이 전해집니다. 정식 문헌(하디스)에 기재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이들 지역에서 수선화가 소중했음을 알려줘요. “그녀의 눈은 수선화 같아, 봄날 이슬 속에 깨어나는 빛처럼” 페르시아의 시인 하페즈가 남긴 시를 보면 영혼을 비추는 창, 눈의 상징으로도 여겨졌음을 알 수 있죠. 그래서인지 지금도 이란(페르시아)이나 여러 이슬람국가에서는 봄의 희망과 영혼의 기쁨을 상징하는 수선화를 결혼식처럼 소중한 날에 장식해요.
그런데 왜 그리스에선 수선화를 나르키소스의 비극과 연결한 것일까요. 이 신화는 ‘교만하지 말고, 너무 자신에게만 빠지지 말라’라는 교훈과 함께 전해집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볼 점이 있어요. 이 아름다운 꽃에는 사실 독이 있거든요. 수선화의 알뿌리는 양파와 매우 닮았지만, 매우 강한 독이 있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고대에서도 일부 의학자들은 이를 주의했죠. 봄에 빨리 만날 수 있는 수선화 꽃은 밝고 화사하여 아이들의 눈길을 끌기 쉬운데, 그 꽃에도 독이 있습니다. 조금 만지거나 향기를 맡는 것으로는 큰 문제가 없지만, 먹거나 즙이 입에 닿으면 구토나 설사를 넘어 마비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죠.
가령, 알뿌리 하나만으로도 강아지나 고양이에겐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요. 대개 손발이 저리거나 기운이 빠지는 정도로 끝나지만, 물가에서 수선화 구근을 잘못 섭취하거나 즙이 입에 닿으면 자칫 사고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 한 소년이 자신의 모습에 빠져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이야기에서 이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요. 혹독한 겨울을 딛고, 얼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연못에서 화사하게 피어올라, 봄이라는 새로운 탄생과 부활을 기념하는 꽃 수선화. 하지만 나르키소스의 슬픈 신화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그 아름다움이 낳을 수 있는 교만과 어쩌면 그 안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경고하는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꽃 속에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수선화. 5월이 되어 수선화 철은 지났지만, 다음 봄이 오면 한 번쯤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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