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쿨한 요즘 할매

2025-04-24

지난가을 나의 친애하는 떡집언니-나에게는 언니요, 남에게는 할매다-가 웬일로 점심을 사겠노라 연락을 했다. 비싼 떡갈비를 얻어먹고 헤어지려는데 언니가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언니의 팔순이었다.

언니는 팔순을 맞아 자식과 친척, 성당 사람들, 친구들 몇 팀에 식사를 대접했단다. 작은 선물과 함께.

“나이 들어봉게 곁에 사램 있는 것이 젤로 좋데. 먼저 안 가불고 나랑 놀아주제, 밥 묵어주제, 월매나 고마운가. 하도 고마와서 나가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이여. 긍게 말 안 했다 서운해 말소이.”

이렇게나 쿨한 떡집언니는 1945년생, 해방둥이다. 여순 항쟁 직후 빨치산의 짐을 날라줬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외삼촌이 한날한시에 세상을 등졌다. 자식 넷을 떠안게 된 어머니는 광의면 여맹위원장이었다. 당연히 어머니도 잡혀들어갔다. 어느 날 유치장에서 임신한 사람은 나오라고 하더란다. 임신한 게 아니었으나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손을 들었다. 기지 덕분에 어머니는 살아남았다. 살아남긴 했으나 고문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한 달에 하루나 빼꼼하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골골대는 몸으로도 어머니는 틀린 꼴 못 보고 얍삽한 사람도 못 봤다. 언제나 똑 부러지게 따져대는 어머니가 언니는 늘 조마조마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텐데, 너무 똑똑한 어머니가 싫었다. 언젠가 언니가 물었단다.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그 사램들이 글드라. 인민의 나라가 되먼 땅도 공평허게 노나주고 공부도 공평허게 시케준다고.”

그런 세상은 끝내 오지 않았고, 그런 세상을 꿈꾼 어머니 덕분에 가족들은 죽도록 고생만 했다. 오빠 둘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떠났고, 어머니 닮아 야무지던 언니는 비단 장사를 하던 중 맹장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언니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뒤 종일 밭에 나가 살았다. 이틀이 멀다 하고 천은사 뒤 지리산으로 나무도 하러 갔다. 어린 계집아이가 종일 걸어 나무를 해봤자 겨우 머리에 지고 올 한 짐, 두어 끼 밥해 먹으면 끝이었다. 해만 뜨면 밭에 나가 일하는 게 끔찍이 싫었던 언니는 읍내로 시집을 갔다.

“읍내 나가먼 달리 살 중 알았제. 철없는 남자가 내 차지가 될 중 워치케 알았겄능가.”

착하기만 오살나게 착하고 돈 벌 줄은 모르는 남편 덕분에 언니는 시집와서도 죽어라 일만 했다. 도무지 방법이 없어 떡집을 차렸다. 일주일씩 자지도 못하고 떡을 빚어 겨우 형편이 폈는데, 그래서 돈 못 버는 남편도 참아줄 만했는데, 돈은 못 벌어도 아내만 최고로 알던 남편이 덜컥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게 언니의 한평생이었다.

나는 언니를 초등학생 때 처음 만났다. 언니는 길에서 만난 우리 모녀를 뭐라도 먹고 가라며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단칸방에 살던 언니는 엉덩이 붙일 짬도 없이 부침개를 부쳤다. 기름기가 거의 없고 종잇장처럼 얇은,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전을. 기름기 싫어하는 나도 배가 터지게 먹었다. 엄마는 늘 그랬다. 떡집에만 가면 배를 따고 먹여서 배가 터질 지경이라고. 몸도 힘든데 제발 남 좀 그만 퍼주라고 언젠가 한 소리 했더니 언니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가. 나넌 참말 쩨쩨헌 사램이여. 에레서 울 어매가 우리 묵을 것도 없는디 자꼬 넘만 퍼중게 고로코롬 싫대야. 그럴라먼 나 중핵교나 보내주제 싶고이. 통이 간장 종지만 허당게.”

통이 간장 종지만 하다는 언니 덕을 참으로 많이 보았다. 명절에도 나는 노닥노닥 배 튕기며 놀았다. 언니가 명절 음식 다 해줬다. 언니 전화 받고 생김치에 식혜, 전, 떡이며 삼색나물까지, 냉큼 달려가서 받아오면 명절 준비 끝이었다.

그런 언니가 팔순 넘어 이제 자꾸 아프다. 오늘 아침 통화 말미에 이제부턴 언니 김치 내가 담가주겠다 큰소리 탕탕 쳤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주기만 한 언니인데, 받기만 한 나인데.

언니 세대가 가고 나면 우리는 누구한테 얻어먹고 사나? 언니 세대는 낀 세대, 퍼주기만 하고 받을 수는 없는 세대, 그들이 가고 나면 인내, 희생, 이런 말도 점차 빛을 잃겠구나, 봄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마음은 한없이 젖어 드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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