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4월 미국 정보 역사에 남을 판결이 나왔다. 미국 정부에 침투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고위직으로 암약한 쿠바 스파이 빅토르 마누엘 로차에게 징역 15년 형이 선고됐다. 1981년 국무부에 들어간 그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남미 담당 국장, 하바나 주재 미국 이익대표부 부대표를 거쳐 2002년 볼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로 퇴직했다. 그 뒤에도 2012년까지 쿠바를 관할하는 남부사령부 자문도 맡았다. 비공개 정보 접근이 가능하고,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였다. 쿠바 정보총국(DGI)의 전략적 설계의 일환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지위와 권력을 누린 그가 스파이였음이 드러나자 미국 사회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쩌다가 중형을 각오해야 하는 간첩이 됐을까.
답은 젊음에 있었다. 쿠바 혁명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가진 23살의 이상주의자 로차는 미국 예일대학교를 졸업하던 1973년 칠레 여행 중 쿠바의 공작에 넘어갔다.
미국서 중형 받은 전 고위 관료
1973년 23세 때 여행 중 포섭돼
이상주의 빠진 청년이 주 타깃
1970년대 북한도 남한 청년 노려

청년의 이상주의를 노린 포섭 공작은 일찍이 북한도 감행했었다. 1973년 김일성의 비밀교시를 보자.
“남조선에는 고등고시에 합격되기만 하면 행정부 등에도 얼마든지 파고 들어가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앞으로는 검열된 학생들 가운데 똑똑한 아이들을 데모에 내몰지 말고 고시 준비를 시키도록 해야겠습니다. 10명을 준비시켜서 한 명만 합격된다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됩니다. 각급 지하당 조직들은 대상을 잘 선발해서 그들이 고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나 경찰 조직에도 파고들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공채 시험을 거쳐 들어갈 수도 있고, 학연·지연 등 인맥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교시가 알려졌을 때 진위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위 탈북자 증언이 나왔고 북한 반잠수정에서 확보한 자료 등을 종합하면 김일성 비밀교시는 사실로 판단된다. 1990년대에 적발된 지식층 간첩들이 비밀교시의 산증인이라는 게 필자를 비롯한 대공 요원들의 생각이었다.
당시 간첩 수사를 하다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대공 용의자가 나타나곤 했다.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였다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포착됐다. 1990년대 후반 정보기관에 적발된 주사파 간첩단이 대표적이다. 이 조직의 핵심 인물 세 명은 명문대 선후배 사이였다. A씨는 일찍이 직업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으나 B씨는 사법시험을 통과한 현직 변호사였다. C씨는 사법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국가정보원이 적발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이들이 계속 경력을 쌓아갔다면 어떤 자리에 올랐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들 중 수사에 협조한 일부는 이후 제 길을 찾아 잘살고 있다. 이들이 북한에 포섭된 나이가 20대 중반이었다.
모든 간첩이 조기에 검거되진 않는다. 오랜 세월이 흘러 훨씬 높은 자리에 오른 뒤 스파이 활동이 드러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념적 동기로 스파이가 된 후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자들은 대개 어린 시절 세뇌되거나 포섭되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에 검거된 전 정당 대표 D씨와 전 S대 교수 E씨도 그런 경우였다. 조사 결과 두 명 모두 20대에 포섭돼 36년간 고정간첩으로 암약했다.
가족 걱정하는 30대는 안 넘어가

수사를 오래 하다 보니 30대만 되어도 많이 달라진다는 생각이다. 가족이나 경제적 안정과 같은 현실적 문제들이 눈앞에 닥쳐 급진적인 사상이나 스파이 활동과 같은 위험한 선택을 수용하기 어려워진다. 그에 비해 20대 이하 청년들은 기존 체제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크고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자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도 있다. 성인이 된 이후 이해관계에 따라 이념을 받아들이는 경우보다 어린 시절부터 사상적으로 세뇌되고 내면화되어 있어 변절할 가능성도 작다. 일찍부터 신분을 구축할 경우 외부에서 의심받을 우려도 적어서 조직에 깊숙이 침투할 수 있다. 대남 공작 지휘부가 장기 목표에 맞춰 간첩의 보직을 전략적으로 조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인간 심리구조를 노린 것이 김일성의 비밀교시였다.
이젠 남북한 격차가 커져 체제 경쟁이 무의미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북한에 포섭된 청년들이 북한 지령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많다. 1990년 주사파 F씨가 밀입북을 마치고 순안비행장에서 서울 귀환을 준비 중 겪은 일화다. 지하당 구축을 임무로 하는 북한 사회문화부(지금의 문화교류국) 이창선 부장이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F씨를 은밀하게 찾았다.
“F 선생, 서울에 내려가면 남한 사회에 한 가지 소문을 퍼뜨려 보시오.”
“무슨 소문 말입니까?”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축지법을 써서 남조선을 다녀오셨다고 말이오.”
“…?”
일단 대답은 했지만 어안이 벙벙했다. 남한으로 돌아온 그는 이행했다는 표시는 해야겠기에 조직원들을 모아 몇 달을 끙끙거렸다. 이듬해 강원·대전·충남 지역에서 ‘특보’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11월 중순부터 경향 각지에는 놀라운 소식이 퍼지고 있다. 이북의 김정일 선생께서 지난 11월 12일 미국과 이남 당국의 허를 찌르고 김포공항을 통해 이남에 오셔서 2박 3일 동안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남 민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 주고 떠났다.”
필자를 비롯한 수사진은 “이창선의 명령 이행이 이 정도였는데, 김일성의 교시에 따른 실행은 과연 어떠할까”하는 걱정을 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청년을 노리는 북한의 시도는 가끔 드러난다. 외국 유학 중 만난 북한 노부부가 친자식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며 집밥을 차려줘 넘어간 경우도 있다. 이 청년은 부부의 부탁을 받아 남한 내 군사기지를 촬영해 제공하려다 적발됐다. 지금도 북한의 대남공작부서는 남한 20대 관심사를 파고들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경찰 총수까지 오른 북베트남 간첩
세계 스파이 전문가 사이에선 베트남 사례가 두고두고 회자한다. 1975년 5월 사이공 경찰청장 찌에우꾸억마잉이 커밍아웃을 했다. 북베트남의 스파이였다. 마잉은 15세가 되던 1956년 사이공 청년 무장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 사이공 법대를 졸업하고 사이공 법원 판사, 검찰부 부원장을 거쳐 사이공 경찰청장에 올랐다. 북베트남 정보기관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안보기관 총수에까지 오른 것이다.
김일성은 비밀교시 이후 20년을 더 살았다. 대남 공작기관에서는 이행 여부를 수시로 보고했을 것이다. 당시 필자 주변에도 “안기부를 박살 내기 위해 안기부에 가겠다”는 지인이 있었다. 다행히 그 지인은 시험에서 떨어졌다.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